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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영 Aug 26. 2017

독신자의 여행법

어쩌면 '혼자 다닌 여행'에 대한 프롤로그

눈꺼풀이 무겁게 잠겨 있는 하늘이었다. 새벽 5시 30분. 택시기사는 날씨는 맑지만 흐린 날이라고 했다. 남부순환도로를 달리는 택시의 저편으로 관악산 위의 낮은 구름이 꾸벅거리며 퍼져있었다. 비는 올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과히 여행을 떠나기에 설레는 날씨는 아니었다.


새벽 6시. 호남선 고속버스터미널에 닿았다. 택시기사는 바나나 우유를 건네며 휴가 잘 다녀오라고 넉넉한 웃음을 보여줬다. 거스름돈을 받지 않고 택시에서 내렸다. 매표소로 가 순천행 첫차를 끊었다. 10분 뒤 열 명 남짓 손님을 태우고 순천행 서울발 첫 차는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빠져나왔다. 날을 샜던 몸은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버스가 고속도로 휴게소에 멈췄어도 몸은 일어나지 못했다.


오전 10시 30분. 예상시간보다 일찍 순천에 도착했다. 날씨는 여전히 흩뿌옇게 흐려있었다. 차를 렌트하는 시간까지 두 어시간 남았다. 순천고속버스터미널에서 시내까지 버스로 40여분.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낯선 동네에서 낯선 발걸음만큼 여행의 시작을 만끽할 수 있는 흥취는 많지 않다. 그렇게 5분여를 걸었다. 순천 매곡동 성당이 보였다. 주일 아침 미사를 거른 날라리 신자로서 살짝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계단을 올랐다. 미사는 아직 성체성사 전이었다.


순천. 하늘의 뜻을 따른 다는 의미. 미사 시간 동안 순천의 의미를 생각해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그 나라가 임하시며. 주의 기도의 첫머리가 결국 순천이 아니던가. 날씨가 흐려 비가 오는 굳은 여행길일지라도 내가 어쩔 수 없는 일. 이 또한 내가 감내해야 할 순천이 아니겠는가 싶어 마음을 고쳐먹었다. 휴가가 아닌 여행. 쉬는 것이 아니라 느끼러 가는 발걸음. 그 길에 날씨는 중요하지 않다고 되뇌었다. 미사는 끝나고 홀로 성당에 남아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미사 후 제대를 정리하던 수녀님들이 말을 걸었다. 여행 중입니다. 수녀님들은 살짝 미소를 짓고 본당 안에서 나가셨다.


키를 건네받고 시동을 걸었다. 프라이드 1500cc 디젤. 1박 2일 동안 나의 발이 되어 남도를 헤매고 다닐 녀석. 생각보다 힘이 좋았다. 엑세레이터를 밟자 시속 100km까지 금세 돌진했다. 몇 번 깜빡이를 켰다 끄며 길을 들였다. 우리 아버지 첫 차가 20여 년 전 프라이드였음을 떠올렸다. 그때 아버지가 아들들을 태우고 드라이브를 했던 그 길이 머릿속에 어렴풋이 생각났다. 와이퍼를 작동하며 낙안읍성으로 차를 몰았다.


안개에 싸인 낙안읍성. 소나기가 내리다 말다를 반복했던 그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홀로 밥을 먹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가족단위의 여행객, 서로 가까이 있고 싶어 하는 연인들. 그 틈바구니에서 돼지국밥을 시켜놓고 망중한을 즐겼다. 막걸리라도 한 잔 마시고 싶었지만 차를 생각해 참았다.


밥을 먹고 낙안읍성 한 바퀴를 돌았다. 생각보다 카메라에 담을 풍경들이 없었다.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을 관람하는 여행객들의 추억을 애써 비집고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낙안읍성의 돌계단을 오르며 몇 번 셔터를 눌렀지만 만족스러운 사진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 높지 않은 계단이었지만 땀을 비 오듯 흘렸다. 몸이 허해졌구나 싶어 서글펐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한 시간여 만에 구경을 마치고 핸들을 잡았다. 행선지는 태백산맥의 주요 무대인 벌교였다.


소설 '태백산맥'... 대학 입학 후 아르바이트를 하며 처음으로 한 질을 다 샀던 대하소설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읽어 끝맺기는 대학교 1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총 열 권짜리 그 소설에서 무당 딸 소화에 대한 아련한 환상과 결국 자신을 짝사랑하는 여자의 몸을 본능에 따라 더듬었던 도덕주의자 김범우에 대한 기억만이 확실하다.


결국 사람의 기억 중에 가장 나중에 까지 남는 것은 사람에 대한 느낌과 인상이다. 벌교로 가는 길. 소설 태백산맥의 인물 중 몇몇을 떠올리며 흐린 창밖을 주시했다. 그 시절 황톳길이었을 낙안에서 벌교 넘어가는 길. 길가는 사람은 없고 서서히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 벼들의 들썩거림만 보였다.


벌교에 도착해 30여분 가량 골목을 돌아다녔다. 벌교 읍내에서 십 여분 떨어진 그곳 담벼락을 사진에 담았다. 골목의 대문도 몇 컷 찍었다. 시골의 집들은 대문들의 모습부터 각자 개성을 지니고 있다. 집주인 마음대로 색을 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의 똑같은 문을 드나드는 도시인들의 삶은 그래서 일괄적이고 개성을 상실한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대문을 어떤 색으로 칠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고민을 하며 살 수 있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사이의 삶. 훗날 내가 당면해야 할 선택일지도 모른다.


순천에 도착했을 때부터 눈에 띄던 성당은 벌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벌교 시내를 한 바퀴 돌고 보성으로 차를 돌리기 전. 벌교 성당에 잠시 들러 여행의 무사함을 다시 기도했다. 결국 1박 3일의 여행길에서 어두운 유혹에서 갈등해야 할 상황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팔자려니 했다.


보성으로 가는 2번 국도는 거의 고속도로 수준이었다. 그 길에서 80km를 유지하며 달리는 내 차가 뒤에서 보기에 답답했던 모양이다. 몇 번 양보를 해주다 홧김에 엑세레이터를 밟았다. 금세 140km가 넘었다. 차들을 따돌리고 내처 달리다 아차. 급브레이크를 밟아야 했다. 신호등 바뀌는 것을 보지 못한 탓이다. 타이어 타는 냄새가 잠시 났다. 잘못했으면 촌노의 경운기에다 차를 받힐 뻔했다. 다시 뒤에서 빵빵거리든 말든 경제속도를 유지했다.


보성에 도착했을 때 날씨가 조금씩 개었다. 보성 녹차밭은 여타의 여행지보다 연인들의 모습이 눈에 많이 띄었다. 홀로 카메라를 들고 땀 흘리며 올라가는 내 또래의 남자 여행객은 없는 듯했다. 대한다업 농장 꼭대기에 올라 사진기를 눌렀다. 렌즈에 습기가 차 몇 번을 닦아 주어야 했다. 옷이 다 젖어 축축했다. 하지만 연인들에겐 문제가 되지 않는 듯. 어깨동무를 하며 올라가는 커플 몇몇 의 사진을 찍어줬다.


보성 녹차밭의 짙푸른 녹색은 편안했지만 기대와 달랐다. 무엇보다 관광지답게 사람이 많은 까닭이었다. 한적한 녹차밭의 풍경을 바랐지만 마치 휴일 서울의 하늘공원 올라가는 길처럼 녹차밭 사이로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그 북적거림에서 홀로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신경이 쓰였다.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목소리를 전하려다 그만뒀다. 나이 서른이 주는 자제력 덕분이었다.


보성을 빠져나오기 전. 잠시 갈등했다. 해남쪽은 구름이 개어가는 것이 보였지만 고흥 쪽 하늘은 더더욱 어두워지기만 했다. 하지만 어차피 마음먹었던 고흥으로 핸들을 돌렸다. 고흥 반도 끝에 있는 외나로도 내나로도, 그리고 소록도에 가려했던 애초의 계획대로 15번 국도를 탔다. 2번 국도보다 훨씬 더 잘 닦인 길이었다.

고흥으로 들어서자 햇살이 비추기도 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드라이브를 즐겼다. 고흥 읍내를 지나 외나로도 쪽으로 차를 몰았다. 길은 2차선으로 좁혀졌다. 그 길부터 고흥의 진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다시 하늘에는 구름이 깔리기 시작했지만 구비 구비 도는 길 사이로 보이는 고흥 앞바다의 모습은 먹먹하게 가슴을 쳤다가 빠져나가곤 했다.


몇 번이나 차를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흐린 날씨가 먼 바다의 모습을 비춰주지 않아 렌즈는 답답해했지만 그래도 보이는 풍경마다 풍족하고 여유로웠고 또 서정적이었다. 그곳의 느낌을 차곡차곡 마음속에 담았다. 한동안 눈을 감고 그 풍경들을 향해 서 있었다.


내가 그곳의 풍경으로 스며들어 고흥의 바람과 고흥의 바다와 고흥의 섬들이 나를 기억해 주길. 훗날 누군가와 함께 다시 그 길을 지날 때 나와 그 사람을 그곳의 풍경으로 받아주길 바라면서 몇 분을 망연히 서 있었다. 도시에서 나를 버렸던 참된 고요가 그 순간에 나를 찾아왔다.


-2006년 처음으로 여름에 휴가를 갔다. 당시 스마트폰도 없었지만 지도를 보면서 여기 저기 잘 다녔다. 만 서른에 처음 떠났던 여름 휴가 여행.  물리적 세월은 흘렀지만 되돌아보면 제자리에 서 있는 것들도 더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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