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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영 Aug 27. 2017

바다 건너 육첩방은 남의 나라

무작정 떠난 오사카·교토 2박 3일 여행기ㅣ 하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교토로 여행을 가려던 이유 중에 하나는 윤동주와 정지용. 특히 윤동주 시인의 자취가 그곳에 있어서다. 윤동주는 1942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했지만 반년 뒤 교토의 도지샤대 영문과로 전입학 한다. 교토의 도지샤대 영문과에는 윤동주가 흠모하던 시인 정지용이 다녔던 학교다. 정지용은 1923년 도지샤대 영문과에 입학해 학업을 마치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윤동주는 정지용의 시집을 중학교 시절 읽으며 남몰래 시심을 키웠다. 15세 차이가 나는 둘은 생전에 만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윤동주의 유고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의 발문을 정지용이 쓰면서 둘의 인연은 시인과 시인으로 맺어졌다. 모국어가 박해받던 시대. 언어를 생명처럼 여기는 시인의 숙명을 감내했던 윤동주와 정지용은 정작 자신이 남긴 시처럼  소박하고 평화로운 노년을 맞이 하지 못했다. 윤동주는 해방되기 전 불량선인이란 죄목으로 끌려가 후쿠오카의 차가운 감옥에서 순국했고 정지용은 해방 전후의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꿋꿋하게 제 길을 가다 결국 한국전쟁 중 서울에서 납북되던 과정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기 때문이다.  


6월의 초순의 교토는 청명했고 습도가 높지는 않았다. 교토 중심가의 주택가에 자리 잡은 게스트하우스는 1900년대 초반에 지은 전형적인 일본 가옥. 대만 학생으로 보이는 처자가 능숙하지 않은 영어로 반겨주었다. 내 영어 또한 초등학교 수준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의사소통은 수월했다. 방을 배정받고 들어가 보니 다다미방. 평생 처음으로 팔베개를 하고 다다미방에 누워보니 윤동주의 '자화상' 한 구절이 절로 떠올랐다. 밤비가 속살거리면 그 시의 여운이 더 깊게 우러나왔겠지만 홀로 여행에 청승은 더했을 터. 다행히 날은 구름 한 점 없었고 조그만 일본식 정원에는 작은 연못과 화초들이 저물어가는 6월의 저녁을 고스란히 받아 차곡차곡 어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도지샤 대학은 숙소에서부터 약 3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밤마실 삼아 다녀올까 하다 말았다. 밤에 윤동주와 정지용 시비에 가서 홀로 상념에 빠지는 조국의 청승남을 두 시인도 바라지 않았을 터였다. 


대신 숙소에서 걸어 20여분 걸리는 기온 거리를 구경하기로 했다. 기온 거리는 교토가 번성하던 시대 유곽이었다. 게이샤들이 곱게 단장을 하고 손님을 받던 곳. 허나 그들 나름대로 예가 있었고 법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유곽이 모두 사라지고 마치 서울의 인사동 거리처럼 교토의 옛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명소로 유명해졌다. 기온 거리를 가는 길에 교토의 주택가와 또 시장과 쇼핑센터를 두루 살펴볼 수 있었다. 주택가 곳곳에는 내가 머무는 숙소처럼 게스트하우스가 있었고 조그만 식당이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이 사는 동네이면서도 거주민이 동네의 주인이 아니라 동네 자체가 사람을 거느린듯한 느낌이 묘했다. 일본의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수도욨던 교토. 교토는 시내가 계획도시였고 대부분 옛 터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한국처럼 전쟁으로 난리통을 겪지 않았던 교토였던 지라 동네가 숙성되다 못해 무르익고 농익어 땅의 기운이 사람을 압도하는 듯했다. 태어날 때부터 면면히 역사가 이어져 내려왔기에 사람은 그저 그 터에서 오고 가는 객일 뿐. 골목과 집에 스며있는 시간의 밀도가 켜켜한 덕에 느껴지는 육중함이 그 동네에는 있었다. 


기온 거리는 번잡하고 좁았고 고급스러웠고 일본 사람들 뿐만 아니라 세계 여려 관광객들로 분주했다. 호기롭게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는 관광객도 적지 않았지만 나처럼 살짝살짝 기웃거리며 메뉴표의 가격에 놀라 그야말로 '구경'에만 만족하는 이들도 많았다. 저녁을 먹고 싶어 여기저기 찾아봤지만 마땅치 않았다. 결국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관광객들이 줄 서 있는 라멘집의 대기석 줄에 합류했다. 아이패드로 확인해보니 나름 관광객들에게 유명한 맛집이란다. 마침 혼자 오는 손님들을 위한 1인용 테이블이 더 많아 왠지 모를 동질감에 라멘 한 그릇과 맥주 한 잔을 비웠다. 마치 전당포에서 밥을 먹는 듯한 기분도 들었지만 이것이 또 한국에서도 보편화될 것임을 직감했다. 일본의 현재가 한국의 미래라는 말은 40% 정도는 어긋나지만 60% 정도는 맞아떨어진다.. 혼자 먹는 이들을 위해 최적화한 식당 구조. 한국에서 낯설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아마도 1인 가구로 사는 내 처지라 더 확신했다. 


다다미방에서의 첫 수면은 쾌적했다. 깔끔한 침구와 고즈넉한 분위기 덕에 숙면을 취했다. 오사카 숙소가 일본 도심의 평범한 시민들이 사는 일상적인 공간이었다면 교토의 숙소는 시골의 외갓집인 것처럼 옛 정서를 체감할 수 있었다. 짐을 정리하고 가방을 둘러매고 도지샤 대학을 가기 위해 나섰다. 숙소를 나오기 전 사진 한 장을 부탁했더니 전날 나를 맞이했던 대만 학생이 기꺼이 찍어 주었다. 숙소에서 도지샤 대학까지 3킬로미터. 대중교통을 이용할까 하다가 일본에 온 김에 택시도 타봐야 할 듯싶어 택시에 올랐다. 도지샤 유니버시티라고 말씀을 드리니 못 알아들으셨다. 해서 지도를 보여드렸더니 예순은 넘어 뵈는 기사 아저씨는 깍듯하게 알아들었다는 몸짓을 하셨다. 5분 남짓 걸린 거리. 교토 성 뒤편의 도지샤 대학까지 1000엔이 나왔다. 일본의 택시비가 비싸다는 말을 굳이 체험한 셈.  


도지샤 대학은 생각했던 것보다 아담하고 고풍스러웠다. 유럽 풍의 석조건물이 많았다. 학생들은 자전거를 타고 수시로 교문과 교정을 드나들었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지용시비와 동주 시비를 찾을 수 있었다. 인도 옆 아담하게 꾸며진 곳에 시비 두 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한글로 새겨진 동주와 서시와 지용의 시 압천을 번갈아 읽었다. 서시는 워낙 유명해 외우고 있는 시였고 압천은 사실 처음 본 시. 압천은 교토 기온 거리 옆으로 흐르는 카모가와(鴨川)를 소재로 쓴 시다. 지용은 가톨릭 신자였고 동주는 개신교 영향을 받아 '십자가'란 시를 쓰기도 했다. 둘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드리고 지용 시비 앞에는 가지고 있던 1단 묵주를 놓았다. 


동주와 지용은 먼 시대의 누군가가 아니다. 내 할아버지 정도 연배. 근현대사의 격랑이 아니었더라면 나와 동시대를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동주보다 15년 이상 더 살았고 지용보다는 5~6년가량 덜 살았지만 그 시대의 청춘들이 겪었을 심란함과 좌절을 나는 감히 짐작하지 못한다. 


도지샤 대학 시비 맞은편에는 유럽 양식의 조그만 예배당이 있었다. 문이 닫혀 있어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지용도 그 예배당에서 기도를 했을 것이고 동주도 그 예배당 어느 구석에서 눈을 감고 망연히 앉아 있던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예배당 바깥을 한 바퀴 천천히 돌았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은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내가 즐기는 휴가의 여유로움. 이를 위해 또 얼마나 많은 역사의 곡절이 있었고 이런 사소하고 평범한 평화를 누리지 못한 이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도지샤 대학을 나와 청수사를 보고 다시 오사카 간사이 공항으로 향했다. 간사이 공항까지 가는 하루카 특급에서 보는 일본 농촌의 풍경은 어느새 익숙해져 딱히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조선이나 일본이나 생명이 자라나는 6월이 녹음에는 별반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믿어도 마음속 갈등이 일어나지 않는 시대. 하지만 그때는 달랐을 것이다. 동주와 지용이 식민지 청년으로서, 지식인으로서 조선과 일본의 풍경을 보던 마음. 거기서 겪어야 했던 괴리감과 자괴감이 그들의 시에 남아을 것이란 생각에 그저 마음이 아리고 아렸다.  


하여 동주의 쉽게 쓰인 시를 다시 한번 읊조려봤다.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리고 역사의 모든 폭력.  우리가 인간이 아니라 동물로서 약육강식에 매몰되어 서로를 파멸과 파국으로 이끌 때 그 근본적인 이유는 결국 인간만이 느끼는 끄러움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부끄러움을 나는 아마도 동주의 시에서 처음 배웠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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