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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영 Jun 21. 2016

교토, 그곳서 본 미소를 어찌 잊을까

무작정 떠난 오사카·교토 2박3일 여행기 '중'

오사카 숙소에서 나와 교토로 가는 길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오사카에서 교토로 가는 기차 안에서 본 풍경ⓒ월영


한국과 일본의 대중교통 시스템이 다르다고만 생각했으면 별로 헤맬 일도 없었다. 그런데 역시 헤맸다. 일본은 민영 철도가 발달한 나라. 서울의 지하철처럼 어느 역에서 표를 사도 지하철 1호선부터 9호선까지 옮겨 타는 데 장애가 없을 거라고 ‘한국 기준’으로 생각한 게 잘못이었다. 


외국에 나가서 종종하는 실수가 나도 모르게 현지의 인프라를 한국 기준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민영 철도마다 별도로 표를 끊어야 하고 운영 방식이 다르다는 걸 주지해야 했는데 엉뚱하게 내가 틀린 것은 생각하지 않고 지도나 가이드가 틀렸다고 생각한 경우가 더러 있어 괜한 고생을 했다. 


지난해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생애 첫 배낭여행을 갔을 때도 그랬다. 이냐시오 동굴이 있는 만레사로 가기 위해 만레사 역을 확인했다. 만레사행 전철을 탔는데 구글 지도에서 확인한 만레사 역이 나오지 않았다. 지도에서 확인한 만레사 역은 분명 지상에 있는 역이었다. 정작 만레사 역이라고 내린 곳은 지하였다. 그때도 내가 잘못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몇 번을 헤맨 끝에 만레사의 숙소에 도착해 다시 찬찬히 지도를 보니 만레사 역이 두 곳이었다. 


스페인 역시 민영 철도가 발달한 나라. 각각 다른 철도회사에서 운영하는 두 곳의 만레사 역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내가 가진 선입관이 내 판단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절감했다. 지도에는 정확히 기재되어 있었지만 같은 역이 두 곳이나 있지 않을 것이라는 내 선입관 때문에 뻔히 나와 있는 노선도 등을 엉뚱하게 해석한 것이다. 오사카에서 교토로 가는 길에서도 그런 실수를 반복했다. JR선과 한큐선 두 회사가 다르다고 가이드북에 나와 있음에도 이 역에선 왜 교토 가는 열차가 없냐며 혼자 우왕좌왕했던 것이다. 



교토에 도착해 처음 가 본 곳은 니조성 이었다. 


교토의 니조성ⓒ월영


오전 11시 오사카 숙소에서 체크아웃 시간에 정확히 나온 데다 교토까지 오는 데 몇 번 우왕좌왕한 탓에 오사카에서 1시간이면 충분하다는 교토에는 오후 2시가 넘어 도착했다.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 끝에 교토의 숙소에 들어가기 전 3곳을 다녀오기로 했다. 그중 첫 번째가 니조 성 이었다. 넥서스 출판사에서 나온 ‘ENJOY 오사카’에 따르면 니조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은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정권을 잡기 위해 1603년 세운 임시 중앙 본부라고 한다. 이에야스의 손자인 도쿠가와 이에미쓰(徳川家光) 때 지금의 규모로 완성했으며 처음에는 간사이 지방의 중앙 본부 역할을 했다. 지금의 가마쿠라에 바쿠후(幕府) 정권이 들어선 이후 일본 천황을 견제하는 목적이나 교토에서 외부 인사를 접견할 때 이용했다.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니조성의 특징은 궁궐 내부 관람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신발을 벗고 직접 성 내부의  천천히 구경할 수 있었다.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과 유치원생들로 북적거렸다. 서양 관광객도 많았다. 하지만 오사카성보다 덜 붐볐다. 아마도 중국인 관광객이 드물어서 그런 듯했다. 


니조성 안의 궁궐은 내부 관람이 가능하다ⓒ월영


니조성은 거대한 영화 세트처럼 보였다. 가이드의 영어 설명을 내 멋대로 해석해보니 실제로 ‘라스트 사무라이’ 등 할리우드에서 찍은 일본 소재 영화들이 니조 성의 내부를 참고해 세트를 지었다고 한다. 사방이 미닫이문으로 열고 닫을 수 있는 구조가 신기했다. 목조로 된 바닥은 귀에 거슬리지 않은 삐그덕 소리를 냈다. 반질반질한 바닥을 보면서 초등학교 시절 목조 마루를 매일 왁스로 광냈던 것이 떠올랐다. 그것이 정성인지 노동인지는 아직도 정확히 구분을 할 수 없지만 목조로 된 그 건물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팔의 근력을 이용해 그 목재들을 길들였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던 것은 어렸을 적 그 왁스질 덕분이었을 것이다. 


내부를 둘러볼 수 있는 니조성의 궁궐은 부럽기도 했다. 국내 4대 궁 가운데 이렇게 실제로 들어가 볼 수 있는 건물이 있었나 싶어서다. 궁궐 역시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왕이건, 왕족이건, 내시건, 궁녀 건 간에 그들이 먹고 자고 사는 공간이다. 사람이 없는 집은 금세 그 거죽만 남는다. 검색을 해보니 마침 모 신문사의 부장께서 니조성을 다녀 간 후 소회를 적은 기사가 보였다. 기사에는 “궁궐은 멀리 떨어져서 ‘눈으로만 보는 것'이라는 선입견을 깨는 경험 이었다”고 적혀 있었다.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니조 성안에는 나지막한 전망대가 있었다. 휴가를 오기 전 서울은 미세먼지로 불투명하고 아침이면 목에서 가래가 끓는 날씨의 연속이었다. 오사카와 교토는 서울과 달리 날씨가 청명했다. 무엇보다 공기가 확실히 맑았다. 일본의 방사능 오염보다 한국의 미세먼지가 더 문제는 아닐까 싶었다. 전망대에 올라 마냥 푸르른 하늘과 순도 높은 바람에 든 생각이었다. 


고층건물과 아파트가 보이지 않는 교토 시내의 모습은 눈에 익으면서도 새로운 풍경인 마냥 신선했다. 아마도 1990년대 초 수학여행을 갔었던 경주의 모습이 그러했었던 듯싶었다. 아니 아파트와 고층건물들이 올라오기 전 한국의 도시들의 모습이 그러했을 것이다. 1000년 역사의 도시 교토. 고즈넉하고 정제된 건물들의 지붕선들이 하늘을 거스르지 않고 있었다. 


니조성 성곽에서 바라본 교토 시내ⓒ월영


물론 일본은 지진 때문에 우리와 달리 아파트를 짓는데 거부감이 크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깔끔한 교토 시내의 스카이라인은 필시 그곳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교토 역시 개발주의자들과 보존주의자들 간에 대립이 컸다고 한다. 거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교토편’을 통해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니조성에서 나와 다음 목적지로 삼은 곳은 고류지. 


한국 표기로는 광륭사. 목적은 단 하나 4대 반가사유상 중 내 눈으로 보진 못했던 목조반가사유상을 직접 보기 위해서였다.  


반가사유상은 중국과 일본, 한국에서 두루 만들어진 불상이다. 특히 한국과 일본의 반가사유상이 미학적으로 완성도가 높아 유명하다. 한국의 제78호와 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일본의 국보인 호류지 목조반가사유상,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 등 4개가 세계 4대 반가사유상으로 꼽힌다. 한국과 일본에 반가사유상이 많지만 높이 1m 내외인 대형 반가사유상은 이들 4점밖에 없다.


한국의 국보 78호 청동미륵반가사유상(왼쪽)과 일본의 호류지 목조반가사유상. 지난 5월 하순부터 3주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공동 전시를 했다. 호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의 최초 외국 전시


한국의 78호와 83호 반가사유상은 지난해 11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동시 전시로 직접 보았다. 그리고 일본의 호류지 목조반가사유상 역시 지난 5월 한일수교 50주년 기념 '한일 국보 반가사유상의 만남‘전을 통해 눈으로 확인했다. 일본이 그토록 자랑하는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이 궁금했다. 사진으로 보는 것과 내 육안으로 보는 것은 천지차이.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은 신라에서 건너갔을 것이라고 추정할 정도로 국보 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유사하다. 다만 크기가 더 크고 보다 간결한 것이 특징이라고 했다. 


고류지 가는 길에 가로질러 간 토에이스튜디오 얼핏 지나치려다 사진기를 들었더니 게이샤 분장을 한 여성 분께서 멈춰 포즈를 취해 주셨다 ⓒ월영


구글 지도가 알려주는 대로 니조 성에서 전철을 이용해 고류지까지 갔다. 역에서 내려 15분 남짓 걸었다. 가던 길에 일본의 영화사였던 토에이 스튜디오 사이로 난 골목길도 있었다. 호기심에 뒤돌아보니 게이샤 분장을 한 배우가 나를 보고 포즈를 취해주었다. 한 컷 담은 뒤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 배우도 같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오사카에서 서둘러 나올 걸 하는 후회가 약간 들었다. 고류지 경내 깊숙한 신영보전에 안치한 목조반가사유상. 그림자와 빛의 경계지점에서 목조반가사유상은 세상의 온갖 상념들의 중심을 꿰뚫고 홀로 청정하게 앉아 옅은 미소로 중생들을 보다듬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었다. 


도대체 어떤 종교적 심성으로 그런 불상을 만들었을까. 한국의 청동반가사유상이 청동을 녹여 만드는 것이기에 기술적으론 더 복잡하고 어려웠을 테지만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의 그 결에서 오는 장인의 경건함과 종교적 깊이에 말문이 막히고 나도 몰래 눈물이 시큰했다.


인터넷에서 퍼옴.  실제로는 반 조명 상태에서 무척 종교적인 아우라를 뽐내며 전시되어 있다. 


결국 인간이 인간답게 종의 특성을 유지하는 건 관념의 사고가 아니라 시공을 초월한 인간에 대한 공감 아닐까? 옛날에는 제대로 된 도상도 없었을 테고 오직 인간의 손으로 눈으로 그런 불상을 만들었다는 걸 상상하니 아득하고 또 아득했다. 그 아득함 끝에 오는 것을 소위 ‘영감’이라고 하던가? 그 영감이 예술가가 아닌 나에게는 비록 큰 소용이 없을지라도 내 인생의 중요한 '공명의 시간'으로는 남았다. 나무를 깎고 붙이던 장인의 손길에 담겼을 불심의 깊이와 종교적 경건함. 이후 천년을 넘게 이어온 사람들의 친견과 소망과 기원과 정념들.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5년 가을 고류지에 와서 목조반가사유상을 보고 이렇게 찬사를 남겼다고 한다.


“오늘날까지 몇십 년간 철학자로 살아오면서 이 불상만큼 인간 실존의 진실로 평화로운 모습을 구현한 예술품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 불상은 우리를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영원한 평화의 이상을 실로 남김없이 최고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훗날 다시 와서 여유 있게 봐야겠다'


우연치 않게 간 아라시야마. 수려한 경관은 아니어서 더욱 정감이 가는 곳이었다ⓒ월영


아쉬운 마음에 다짐을 하고 고류지 경내를 나왔다. 한 칸만 운영하는 전철이 보였다. 숙소 인근의 역으로 가는 전철이었다. 확인도 하지 않고 탔다. 숙소와 반대 방향으로 갔다. 아차! 했지만 전철의 종착역은 아라시야마. 교토 외각의 가쓰라 강 인근의 유원지로 가이드 책에도 나온 곳이었다. 그냥 갔다.


역에서 내려 도월교를 건너 제방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근처 벤치에 앉아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를 따고 강물에 건배를 했다. 밀회를 나누는 젊은 연인들. 어린 아들과 나들이 나온 부부, 홀로 셀카를 찍고 있는 관광객 등등 제각각이지만 오후의 여유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로 강변은 적적하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 없이 발길 가는 대로 근처를 30여분 정도 배회했다. 비로소 휴가 중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다시 강변의 벤치에 앉아 괜히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오른손에 턱을 가볍게 괴고 눈을 감았다. 고류지에서 본 목조반가사유상처럼 사바세계의 중생을 어떻게 구제해야 하나. 알듯 모를 듯한 묘한 미소가 내 얼굴에서 나오진 않았을 테지만. 누군가 지나가는 사람은 살짝 궁금해했을지도 모른다.


무엇이 좋아 저리 혼자 흐뭇해하고 있을까.


https://brunch.co.kr/@doksin/104

https://brunch.co.kr/@doksin/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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