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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영 Jun 21. 2016

고대산, 평범함의 축복

1박 2일 백패킹

계속 오르막이다. 숨이 찬다. 집에서 한 시간은 일찍 나와야 했다. 북쪽으로 향할수록 송전탑과 아파트가 보이지 않았다. 그 풍경을 보느라 차의 속도를 늦춘 바람에 예정시간보다 더뎠다.


오후 6시 30분. 해가 거의 기울어졌을 때 2 등산로에 접어들었다. 정상까지 2시간 15분가량 걸린다고 한다. 이왕 늦을 거 야간등반을 고려했지만 막상 랜턴을 켜고 오르려니 홀로 감내해야 할 어둠이 낯설었다. 게다가 쉴 틈 없는 길이다. 


계단을 오르고 올라 시야가 터진 산등성이에 닿았을 때 마침 전망 테크가 나왔다. 이틀 지난 초승달은 반쯤 부풀어 올라 서쪽 하늘 한편에서 구름 사이를 갈라놓고 있었다. 멀리 정상부의 능선이 보였다. 한 시간은 더 올라야 할 듯. 여기서 텐트를 펼칠까? 물 한 모금 마시고 바람막이를 꺼내며 잠시 고민했다.


다시 짐을 추스르고 일어섰다. 바위길이 나왔다. 계단보다 차라리 낫다. 신경이 예민해지고 허벅지와 종아리의 근육이 긴장한다. 그렇게 정신을 집중시키면 어둠은 신경 쓰이지 않는다. 마침내 정자가 있는 봉우리에 닿았다. 이곳에선 큰 빛을 볼 수 있나. 봉우리 이름이 대광. 하지만 정상은 아니다. 500미터는 더 가야 이 산의 정상이다. 정자 밑에 텐트를 치면 이슬을 맞지 않는다. 비가 와도 걱정이 없다. 또 망설인다. 


어차피 하룻밤 산에서 묵는 일. 여기나 거기나 매한가지. 그렇지만 동쪽으로 하늘이 트이지 않았다. 일출을 볼 수 없다. 호흡을 가다듬고 또 앞으로 나아간다. 몸은 늘 다짐을 회유한다. 텐트를 열었을 때 누워 여명을 볼 수 있는 호사를 누리고 싶어 이 산에 왔다.


시계를 보니 오후 9시가 안됐다. 얼추 산 아래 표지판에 쓰인 만큼 걸렸다. 혹시나 했는데 아무도 없다. 오늘 이 산은 온전히 나의 것이다. 텐트 열 동은 칠 수 있는 널찍한 나무테크. 비상시에는 헬기장으로 쓰이는 곳. 민간인이 군의 허가를 받지 않고 오를 수 있는 가장 북쪽의 산. 


유년시절 산 아래 역까지는 몇 번 왔었다. 그때 저 산의 꼭대기에 올라 홀로 잠을 청하리라고 생각해본 적 없다. 생각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는 게 인생이다. 다행히 누구의 강제가 아닌 스스로가 원해 여기에 있다. 배낭을 풀러 텐트를 치고 하룻밤 거처를 마련했다. 한 평 남짓한 텐트가 오늘 밤 나의 처소고 전부다. 더할 것도 부족할 것도 없다.


맥주를 꺼내어 들이켰다. 멀리 북쪽의 산들은 어둠 속이지만 제각각의 그림자로 솟아있었다.. 군인들이 지키고 있을 전방고지의 불빛도 보였다. 백조자리 별빛이 또렷했다. 연두색 빛 궤적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듣건 말건 너에게 건배. 취한 반딧불이 하나가 계속 주변을 맴돌았다.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또 끓어올랐다. 액정화면 속 안테나가 다 켜있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사진을 찍고 산 아래 이들에게 송신했다. 갈수록 감정은 하나로 뭉치지 않고 양쪽으로 나뉘어 스스로 커진다. 홀로 있고 싶고 또 홀로 있기 싫다.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고 당신의 목소리를 잊고 싶다. 스르르 눈이 감긴다. 텐트 안으로 들어와 침낭의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전원이 나가듯 잠들었다.



알람이 울리기 전 눈 떴다. 사위가 환해지고 있었다. 텐트 문을 열고 크게 심호흡했다. 또 스위치를 켠 것처럼 순식간에 정신이 든다. 체내 유해산소를 환기시키는 기분. 이것도 중독이다. 


텐트에서 나와 산 아래를 보니 산들이 파도처럼 너울 거렸다. 그 사이사이로 모래처럼 빛들이 퍼진다. 해가 뜨기 시작했다. 카메라에 담았다. 이렇게 하루의 시작을 온전히 저장했다. 텐트로 들어와 누웠다. 절로 명상이 됐다. 억지로 눈을 감거나 뜨거나 조차 잊은 상태. 걱정이나 근심, 설렘이나 즐거움도 아닌 아무렇지도 않은 상태. 짧은 순간의 무심을 위해 어제 이 산을 올랐지. 라고 생각한 것은 한참 후였다.


끼니를 채우고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짐을 추슬렀다.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비 온다는 예보는 없었지만 산의 날씨는 산에서만 알 때가 많다. 하룻밤 호사를 누린 곳을 다시 한 번 카메라에 담았다. 사람만 인연이 있지 않다. 장소 또한 마찬가지. 또 오겠지.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은 그렇게 상쇄됐다.


다른 길로 내려온다. 젊은 군인들이 땀이 배어있는 곳들이 많았다. 의미 없는 ‘삽질’이 아니었다고 인사를 했다. 산에 사람 흔적이 없는 듯 하지만 아니다. 내가 오른 산은 누군가 올랐던 산이고 누군가 미리 길을 냈던 곳이다. 홀로 산에 올라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잠을 잤더라도 사람의 손길이 가 있지 않은 곳에 내가 머문 적은 없다. 자연뿐만 아니라 남의 수고로움을 누린다. 산에 다녀올 때마다 번번이 깨닫는다.



1시간 30여분 만에 하산했다. 사지육신 멀쩡해 이리 몸의 자유로움을 누리고 산다는 것에 감사. 헛된 바람이 들 때 혹은 남들과 비교에 괜히 마음이 삐뚤어질 때 되새겨야 하는 사실. ‘건강함, 그리고 평범함의 축복’이다. 가지지 못했다고 억울해하지 말고 있는 것조차 누리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반성해야 할 뿐. 산 아래 역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를 한 뒤 거울을 보는데 슬며시 웃음이 났다.


‘아! 왜 이리 행복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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