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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영 Nov 07. 2016

11월, 제주에 가시거든

가을은 홀로 세심하게 스며있었다

1.
딱히 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제주에서 돌아온 날 노트북을 켜놓고 자판에 손을 올려놨지만 몇 마디 적다가 지우기만 반복했다.  아른 거리는 풍경과 떠오르는 감상은 있어도 그것을 언어로 끄집어내기가 어려웠다.


다녀 온지 꼬박 하루가 지나서야 조금씩 쓰고 싶은 말들이 몸 밖으로 밀려나오기 시작했다.   


2.
제주에 사는 지인들을 만났다. 최소 10년 전부터 알고 지낸 인연들. 한 분은 정년퇴직 후 서울에서 연고 없는 제주에 정착 하셨다. 한 명은 제주가 고향이고 한 명은 직장 탓에 제주와 서울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 


출장이나 여행에서 현지에 살고 있는 지인과 만남은 많은 여운을 남긴다. 내가 누군가에게 거북한 사람이 아님을 증명해주는 일. 서로가 악연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일. 두 가지의 결합은 만남의 밀도를 높이고 추억의 유효기간을 연장한다.  


제주 영실기암을 지나 윗세오름을 넘어 남벽으로 가는 길 ⓒ월영


삶을 정의하는 숱한 금언 중에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는 게 인생이란 말이 실은 가장 보편적이고 타당한 금언이다.  그간의 훌쩍 떠남이 주로 나와 홀로 독대하는 시간이었다면 이번 제주행은 서로 공유할 기억이 있는 지인들을 만났다는 점에서 달랐다. 


어쩌면 여행이란 집으로 돌아오는 먼 길이기도 하고 먼 곳에 사는 지인을 만나러 가는 발길이기도 할 것이다. 서로 시공간을 공유했던 이가 그 곳에 산다는 이유만으로도 그 장소와 지역은 한낱 지도상에 존재하는 기표가 아닌 체온을 지닌 사람이 희로애락을 겪으며 살아가는 터전으로 마음에 남는다. 


제주도는 그래서 풍경과 더불어 다시 한 번 마음에 남았다.


3.
숲은 그저 평화롭고 오름은 평온했다. 가을은 구석구석 세심하게 스미어 제 각각의 빛깔로 곱게 한 해를 단장하고 있었다. 하늘은 더 없이 푸르러 내 안의 삿된 욕망들이 부끄러웠고 바다는 한 없이 투명해 당장이라도 뛰어들고 싶었다. 


오가는 차량 없는 중산간 도로에서 차를 세우고 한라산의 해거름을 보았다 오리온좌와 페가수스, 북두칠성 등 빈약한 별자리 지식을 동원해 밤하늘의 별들을 세었다.


제주 사려니 숲길 ⓒ월영


깊게 잠든 삼나무들이 숨소리를 바람이 들려주었다. 아침나절 숙소 앞 마당.  더욱 노르스름해지는 감귤나무의 감귤을 슬쩍 따다 싱긋거리며 먹었다. 인적 없는 돌담길에 차를 세워 놓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귀 익은 노래들을 들었다. 


숲속에서 빤히 나를 보는 노루의 눈망울과 마주쳤고 까마귀들의 퍼덕거림 속에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기도 했다. 빼곡히 들어선 편백나무 그림자들이 햇살을 몸속에 가두는 모습을 보았다. 하루의 온기가 흙길 안으로 침잠하며 품어내는 맑은 내음도 맡았다. 안개와 구름의 사이에서 바위덩어리 산봉우리가 은막 안으로 사라지다가 홀연히 나타나는 마술 같은 풍경에 넋을 잃었다.


제주 한라산 남벽 ⓒ월영


4.
제주의 가을은 처음이었다. 운이 좋아 머무는 내내 날이 좋았다. 바람이 거세지 않았고 비가 흩날리지도 않았다. 봄날처럼 기온도 따스했다. 


성산일출봉이 바라보이는 성당에서 평일 미사를 드렸고 성산 앞바다의 일출을 보았다. 20년 전에 올랐던 성산일출봉 정상에서 스무 살의 나를 떠올리고 훗훗 웃었다. 한라산의 절경인 영실기암과 윗세오름 그리고 남벽에 다녀왔다. 마시고 싶을 정도로 맑디 맑은 바닷물을 해녀들의 일터에서 보았다. 


사려니 숲길을 걸으며 종종 홀로 그 길을 독차지해 황홀했고 그윽했다. 제주도민들이 자주 간다는 연동의 횟집에서 제철 방어회를 먹었다.


오직 아쉬운 것은 시간뿐이었다. 3박4일. 그러나 가는 날과 오는 날을 빼면 오롯이 제주를 느낄 수 있던 시간은 이틀 밖에 없었다. 


시간의 가속도는 제주에서 더 빠르게 붙었다. 물론 제주가 내 일상의 공간은 아니기에 그럴 수 있다. 여행으로 떠난 곳은 적이 ‘낭만’이 붙어 부풀려지기 마련 아니던가. 그럼에도 제주가 보여준 본연의 자연과 여유. 그리고 인연들과의 추억은 하루쯤 묵은 뒤에야 비로소 내 마음 어딘가에서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제주 세화 앞바다 ⓒ월영


5.
찬바람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고 퇴근만을 기다리며 출근하는 소시민의 일상을 반복할 것이다. 허나 아마도 당분간 그 일상의 고루함과 비루함, 단순함을 버티어 낼 수 있을 듯 싶다. 


제주에서 담아온 그 무엇의 감정과 정서의 진액들. 작품 같은 풍경들이 이처럼 마음 허할 때마다 되돌아볼 수 있는 글이 되었고 사진으로 남아서다.   


제주 한라산 남벽 되돌아 오는 길 @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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