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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영 Jan 23. 2017

한겨울 삭풍에 산으로 가는 이유

독신자의 여행법

24절기 중 가장 춥다는 대한 즈음의 주말. 영하 10도 이하의 날씨에서 강원도 춘천의 산으로 백패킹을 다녀왔다. 


지난해 2월 선자령 눈밭에서 홀로 백패킹을 했지만 그때 날씨는 영하 1도, 바람만 불었지 텐트안의 물이 살짝 어는 정도였다. 이번에는 달랐다. 코펠에 물을 부으면 바로 살얼음이 얼었다. 앉아 있으면 금세 손발이 곱아 물건을 잡기 어려웠다. 게다가 발포매트를 챙기지 않아 얇은 에어매트 깔고 동행들의 간이 방석을 얻어다 밑바닥에 댔다. 사실상 얼음위에서 잠을 잤다.


'왜 따뜻한 물 나오고 이불 포근한 집 놔두고 비싼 돈 들여 장비사고 한겨울 삭풍에 언 손을 녹여가며 생고생을 하고 있을까?'  


핫팩도 미지근해지는 텐트 안 우모침낭 속에 들어가 곰곰 생각했다. 딱히 답은 없었다. 안온한 일상의 환경에 비해 다소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것 하나만큼은 흥미진진했다. 누가 시키지 않은 고생인 것도 부인하지 못했다.


잠들기 전 눈 감으니 동쪽 하늘에서 붉게 올라오던 달빛이 떠올라 황홀했다. 그 달빛 속에 사며드는 별빛들의 여운이 아쉬워 잘 알지도 못하는 별자리를 머릿속에 그렸다.

깊은 산중, 겨울은 저도 추운지 더욱 체온에 집착했다. 입에서는 한기가 나와 텐트 안에 결로가 생겼다. 발이 시려 몸은 잔뜩 움추렸다. 허나 심장은 어디하나 구겨지지 않았다. 서로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저 뜻이 맞아 같이 고생을 자처한다는 이유만으로 나눠주고 배려하는 동행들 덕에 마음은 훈훈했다.


몇 번 자다 깼지만 선잠은 아니었다. 아침에 눈 뜨는 순간 몸의 세포들이 마치 처음 산소를 흡수한 태아의 몸 인양 움틀거렸다. 번잡했던 머릿속 지저분한 상념들은 차갑게 얼어붙어 투명해졌다.


'아! 이래서 내가 여기에 있구나.'


오지 않으면 잊었을 그 감정과 깨달음을 다시 되새긴다. 착각일 수 있지만 몸이 다시 태어나는 느낌. 그 맛에 산으로 짐을 지고 와 잤던 것이다.


동행들이 아침을 맞이하며 인기척을 냈다. '밤새들 안녕하셨구나' 반가웠다. 조금 더 눈 감고 밤새 어둠과 냉기 속에 정화된 산소들을 심호흡으로 음미했다. 텐트 옆이 환해질 때 텐트 문을 열고 나왔다. 동쪽으로는 밤새 석탄같은 어둠을 흡수한 태양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멀리 경기도에서 가장 높다는 산봉우리를 보며 저 산의 흐름을 응시했다. 이어졌으나 끊어진 산맥. 저 산위의 바람처럼 우리도 언젠가 훌훌 저 능선을 타고 넓은 대륙으로, 혹은 바다로 갈 것이다. 그 바람을 되뇌었다.


짐을 챙기고 흔적을 지우고 각자 배낭을 짊어진 채 숙영지를 떠났다. 느릿하나 리듬을 탄 발걸음이 눈길위에 선율을 남기며 일렬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산행을 다니면 여지없이 두발로 이 땅에 솟아난 곡선들을 애무하며 나아간다. 부드럽고 포근한 감촉과는 거리가 먼 쑤시고 결리는 통증을 수반한다. 어느새 그 통증이 목줄기를 타고 정욕이 휘발된 희열로 순화돼 짜릿짜릿해진다.


등 뒤 배낭 무게도 잊게 되고 마냥 눈앞의 능선이 끝없기를 바란다. 가만히 있으나 출렁거리는 산들의 너울들이 

펼쳐지면 순간 내 다리와 심장과 시각과 후각과 청각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그 풍경들을 받아들여 같이 숨을 쉬기 시작한다.


그때는 잠시 길을 멈추고 눈을 감는다. 찰나의 순간이 지나가지만 그 시공의 좌표가 내 기억에 각인된다. 그 좌표를 모으기 위해 또 산행을 하고 짐을 짊어지고 하룻밤 그 산에 몸을 의탁한다. 이번 산행으로 일 년 열 두 달. 각 달마다의 좌표를 모아보겠다던 그 언젠가의 다짐이 거의 이루어졌다. 절로 두 손을 모았다.


내가 산에 준 것도 없는 데 산으로부터 받은 게 많아진다. 산을 알지 못하는 이들의 불행이 무엇인지 점점 구체적으로 알아간다. 행여 누군가 그 불행에 화가 나기를. 산에 다녀온 흔적과 사진을 굳이 남기는 이유 중에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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