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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영 Mar 02. 2017

선자령, 겨울과의 이별

독신자의 여행법

출발하기 전 확실한 건 두 가지. 대관령 부근 날씨와 블로그에 올라온 선자령 비박 후기에서 봤던 선자령 정상 동쪽에 비박지가 있으리라는 것.


오전 8시에 일어난다는 것이 늦었다.  오전 10시 30분쯤 겨우 일어났다. 이것저것 잡무를 처리하고 주변을 정리하다 보니 시간이 오후 1시가 넘었다. 서둘러 집을 나섰다.  오후 4시쯤에 선자령에 도착하면 크게 늦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길은 막히지 않았는데 내비게이션을 잘못 조작하는 바람에 영동고속도로 횡계 IC를 지나쳤다. 결국 강릉까지 가서 국도를 타고 다시 대관령을 올랐다. 대관령휴게소에 도착한 시간은 얼추 4시 50분. 


해가 지려면 한 시간 반쯤 남아있었다. 길이 순탄해 야등도 힘들지 않다는 후기들을 읽은 덕에 선자령길을 올랐다.


하지만 KT 송신탑까지 편한 길을 놔두고 우회로를 택한 것부터 잘못이었다. 국황사까지 가는데 40여분을 넘게 소요했다. 선자령 입구를 지나 능선에 오르니 벌써 하늘은 어둑어둑해졌다. 전망대와 나뉘는 길목에서 전망대 쪽으로 오르는 길을 택했다. 결과적으로 험한 길(?)을 선택한 것이 무사 생환하게 된 결정적 요인이 됐다.  


전망대에 오르니 강릉 시내가 보였다. 도시의 불빛에 다소 마음이 놓였다. 대관령 도로는 어둠을 가르는 빛의 등고선이 칭칭 휘감겨 오르고 있었다. 해가 진 상황에서 선자령까지 가기는 무리라고 판단해 전망대에서 텐트를 쳤다. 데크가 널찍하니 좋았던 이유도 있다. 데크에는 팩이 박히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일단 텐트 안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고자 누웠다. 바람이 슬슬 불기 시작했다. 삼십여분이 지났을까? 텐트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도저히 텐트가 온전히 버틸 수 없을 듯싶었다. 순간 고민했다.  철수하는 게 맞다는 판단이 섰다. 서둘러 텐트를 걷어냈다. 짐을 꾸리니 바람이 더 거세어졌다.


어떻게 할까? 선자령 정상까지 1시간 30분 정도 걸릴 듯했다. 시계를 보니 오후 7시 30분. 늦은 시간은 아니었고 멀리 선자령 쪽에 불빛이 보이는 걸로 봐서 막영 하는 이들이 몇 더 있을 듯했다. 선자령 동쪽 사면에 바람 불지 않는 사이트가 있다는 후기만 믿고 선자령 쪽으로 향했다. 다행히 날씨는 그리 춥지 않았다. 설사 선자령에 비박지를 못 찾으면 다시 대관령휴게소로 가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전망대에서 선자령 쪽으로 한 3~4분쯤 내려오던 중 길 왼쪽으로 누군가 눈을 치우고 야영지를 구축한 곳이 보였다. 길에서 약 50미터가량 벗어난 곳이었다. 가보니 네 곳 정도에 막영지를 구축한 흔적이 보였다. 부모님께서 무슨 은덕을 쌓으셨기에 아들이 또 이렇게 위기를 모면하는구나. 고마운 마음에 바로 그곳에 텐트를 치고 막영지를 꾸렸다. 능선에 휘몰아치던 바람은 웅웅 거릴 뿐 그곳까지 내려와 심술을 부리지 않았다. 짐을 풀고 시장기를 채우기 위해 라면을 끓였다. 그리고 쏘맥을 말아 반주를 했다. 그깟 소피쯤이야 하며 벌컥 들이켰다.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먹고 침낭에 누우니 포근했다. 물이 얼지 않는 걸로 봐서 영하의 날씨가 아니었다. 일기예보가 얼추 들이 맞았다. 오히려 11월 운악산에서 막영 할 때보다 춥지 않았다. 멀뚱 누워 일단 잠을 청했다. 하지만 바람 소리가 점차 커졌다. 풍량도 풍성해졌다. 바람이 입체 서라운드로 허공을 헤집고 다녔다. 바람의 교향곡이 이런 건가 싶었다. 좌우상하 횡으로 종으로 또 사선으로 맹렬히 달리다가 어느 순간에는 사뿐사뿐 스타카토로 불어오고 한동안 침묵에 싸여있다가 또 갑자기 포효하고 그러다 서럽게 울다 또 웃다가 내 텐트마저 뒤흔들고.


그렇게 밤새 바람 소리에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열 두시쯤 소피를 보러 밖으로 나오니 밤하늘은 검지 않고 짙은 회색과 밝은 검정이 분탕질되어 있었다. 그리고 싸락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다시 텐트로 돌아와 묵주기도를 드렸다. 기도의 효과가 있었는지 잠이 들었다.


하지만 새벽 3시께 또 깨고 말았다. 바람이 더 거세어졌다. 사면임에도 바람은 거기까지 내려와 패거리 짓을 해대고 있었다. 기도를 해도 효험이 없었다. 아이패드로 파우스트를 꺼내 읽었다. 아..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게 재미있었다. 자려고 펼친 책이었으나 결국 백여 페이지 넘게 읽고 말았다.


새벽 4시 반 다행히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눈을 뜨니 7시 20분. 마치 위장 내시경 할 때 프로포졸 맞고 잠들다 깬 것처럼 순식간에 깊고 맑고 개운한 잠을 잤다. 채 정신이 완전히 들기 전 코끝에서 느껴지는 그 차가운 숲의 기운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더 자려 눈을 감았지만 정신이 또렸해졌다. 평소 집에서 편히 자는 내 수면의 질이 밖에서 이리 고생을 하고 잔 것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 나와보니 숲은 신비로운 은빛 회색의 세상이었다. 밤새 내린 싸라기눈은 바람에 날려 텐트에 쌓이지 않았으나 주변 물푸레나무들에게 은색 붓칠로 그림을 그려놓았다. 다행히 하늘도 개기 시작했다. 시야가 흐리면 선자령까지 가지 말고 대관령휴게소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짐을 다 꾸리니 날은 되려 맑고 화사해졌다. 나도 모르게 빠른 발걸음으로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손짓하는 언덕으로 몸을 움직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영동고속도로는 강릉방향으로 내내 정체였다. 저 막히는 길 위 차 안에 있는 이들 중 과연 몇몇이 선자령의 밤을 알 수 있을까? 아니 어둠을 두른 산이 주는 그 고요와 침묵을 몇몇이나 감응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이렇게 선자령 그 능선에서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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