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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영 Jul 03. 2017

아시시, 내 안에는 감탄사가 있었다

이탈리아 아시시 여행기 1

현지 시간 오후 9시쯤 이탈리아 로마의 파우치니 공항에 내렸다. 6월 하순 로마의 공기는 후덥지근했지만 탁하지 않았다. 공항철도를 탔다. 서머타임으로 아직 석양이 남아 있는 창밖을 보면서 비로소 로마에 도착했다는 게 실감 났다. 30여분 후 테르미니 역에 도착했다. 테르미니 역에서 열차를 타고 내릴 수 있는 플랫폼은 스무 개가 넘었다 서울역의 두 배 이상 되는 규모였다. 눈으로 대충 역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역 주변에는 여행객들과 현지의 젊은이들로 북적거렸다. 아시시로 가기 위해서는 다음 날 다시 테르미니 역으로 와야 했다. 처음 가는 길에 행여 실수하지 않기 위해 아시시행 열차가 출발하는 플랫폼을 찾으려 했다. 5분 남짓 둘러봤지만 찾지 못했다. 피곤이 몰려왔다. 숙소로 잡은 한인 민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로마 내 유색 인종이 많이 몰려 있다는 테르미니 역의 서쪽 주변. 다행히 오가는 이들이 많았다. 어렵지 않게 숙소를 찾아 짐을 풀었다.    


한국에서 여행 일정을 세우면서 이탈리아 철도(트랜이탈리아) 홈페이지에서 확인을 해 보니 테르미니역에서 아시시를 가는 열차는 하루에 10회 이상 있었다. 단 환승을 하지 않고 바로 가는 열차는 하루에 3~4편. 낯선 외국에서 환승을 하는 일이 만만치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로마에서의 일정 상 아시시로 바로 가는 기차를 타기에는 시간대가 맞지 않았다. 오후 3시 58분에 출발해 오후 5시 52분 폴리뇨(foligno)에서 내려 오후 6시 아시시로 가는 기차로 환승하는 표를 예매했다. 폴리뇨 역에서 아시시 역까지는 15분 남짓 가까운 거리였다. 

테르미니역은 광활했다. 출발 30여분을 남겨놓고 역에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난처한 상황에 놓였을지도 모른다. 폴리뇨로 가는 기차는 테르미니역의 정면 입구에서 뒤쪽으로 어림잡아 500미터 이상 떨어진 별도의 플랫폼에서 출발했다. 서울역으로 치자면 KTX가 출발하는 플랫폼의 끝에서 약 300미터 이상 떨어진 별도의 플랫폼에서 출발하는 셈이다. 유럽과 이탈리아 각지로 떠나는 고속열차들을 뒤로하고 테르미니역 건물을 벗어나 야외 플랫폼으로 갔다. 플랫폼의 열차 안내판에 내가 타야 할 기차의 번호가 적혀 있었다. 스마트폰으로 다운로드한 열차표에는 좌석 번호는 없었고 객차 등급만 나와 있었다. 열차 출입문에 종이로 붙여 놓은 객차 등급표를 확인하고 자리에 앉느라 시간이 약간 걸렸다. 열차 안에는 머리카락 검은 동양인은 나 밖에 없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무궁화호 열차 수준이라고 한다.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내려 봤던 이탈리아의 땅은 비옥했다. 기차를 타고 가며 본 이탈리아 움브리아 지방의 산과 들은 온몸으로 햇볕의 따가움을 받아내면서도 생기를 잃지 않고 있었다. 직사광선은 원근의 감각을 무력화시키려는 듯 내려쬐었지만 빈 곳을 쑤시며 파고드는 악랄함은 없었다. 듬성듬성 보이는 그늘 아래에는 돗자리를 펴고 누워 오후의 햇볕을 만끽하는 연인들도 얼핏 스쳐 지나갔다. 추수를 끝낸 밀밭은 헐벗었지만 삭막하지 않았고 초원 위로는 소와 양 떼들이 자유롭게 먹이를 뜯고 있었다. 인상적인 것은 해바라기 밭이었다. 생전 해바라기가 펼쳐진 평원을 처음 보았다. 로마에서 한나절 돌아다닌 덕에 몸은 노곤해졌지만 눈을 감기 아쉬웠다. 


스마트폰으로 구글 지도를 켜놓고 확인했다. 기차는 폴리뇨 역으로 달리고 있었다. 초행길이라 혹시라도 잘못 내릴까 봐 역 도착을 앞두고 미리 열차 출구로 나왔다. 열차가 섰기에 내렸다. 무언가 이상했다. 역내 표지판을 보니 폴리뇨 역이 아니었다. 화들짝 놀라 다시 열차에 올랐다. 기차가 5분 정도 연착을 하는 바람에 표에 적힌 폴리 노역 도착 시간에 선 곳은 폴리뇨 역 전의 역이었다. 한숨을 쓸어내렸다. 폴리뇨 역에 내렸더니 맞은편에 기차가 서 있었다. 눈치로 보니 그 열차가 아시시행인 듯싶었다. 수녀님들이 내가 내렸던 열차에서 내려 그 기차로 옮겨 타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기차는 아시시로 향했다. 아시시 역에 내린 시간은 기차표에 찍혀 있는 오후 6시 13분 보다 5분 정도 늦은 시간이었다.    



역으로 나와 보니 이미지로만 봤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이 멀리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별생각 없이 기다리다 버스가 도착했다. “프란치스코 바실리카?”라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넉넉하게 생긴 버스 운전기사 아저씨는 손짓으로 타라고 했다.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았다. 아시시 역 주변을 벗어나 맥도널드를 끼고 우회전을 해 5분 남짓 버스가 아시시를 향해 도로를 달렸다. 


아시시로 올라가는 고갯길 전에 해바라기 밭을 보았다. 해바라기들은 서편으로 내려앉고 있는 태양을 등진 채 서서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마치 기도를 하는 듯 고개를 내리고 있는 해바라기 밭에서 함께 두 손을 모으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참았다. 남프랑스는 아니지만 고흐가 왜 해바라기에 집중했는지 짐작이 갔다. 한국에서 담장이나 화분에 심어진 해바라기가 아닌 너른 들판에 피어난 수 천 수만 송이 해바라기가 서 있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영감’을 주기에 충분한 듯했다. 


버스에서 내릴 때 요금을 내려했더니 버스 기사 아저씨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티켓? 손사래를 치며 지폐를 꺼냈다. 버스 기사 아저씨는 난감해하다 이내 살짝 웃더니 그냥 내리라고 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역에서 버스 티켓을 사야 했다. 졸지에 공짜로 버스를 탄 셈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모자를 벗어 꾸벅 인사를 하고 내렸다. 아시시 성 밖의 공영주차장에 내리자마자 성 프란치스코 성당이 바로 지척으로 보였다. 


아시시는 한국에서 이름 난 이탈리아의 관광지는 아니다. 로마나 피렌체, 나폴리, 베네치아, 피사, 밀라노, 폼페이 등등 이탈리아의 유명 관광 도시에 비해 아시시를 아는 이들은 드물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에게 아시시는 교황과 바티칸이 있는 로마와 비견할 만한 성지다. 바로 프란치스코 성인이 태어나고 죽은 곳이 아시시이기 때문이다. 


성 프란치스코(1181년 또는 1182년~1226년)는 2000년 그리스도교 역사상 초대 교회의 사도들 외에 가장 영향력이 컸던 성인으로 꼽힌다. 그리스도교는 예수 사후에 벌어졌던 그리스도교 초기의 박해를 이겨내고 로마 제국의 국교로 공인받은 이후 세계사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교는 서양을 장악했고 종교 권력과 정치권력의 제정일치를 이루며 종교가 지닌 본래의 순수함이 퇴색하고 종교 또한 세속 정치를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고 만다. 



암흑기라고 불린 중세는 종교와 정치권력이 신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앞세워 인간을 억압하고 또 부패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그리스도교의 계명을 스스로 실천하며 중세 그리스도교의 위기를 혁파했던 이가 바로 프란치스코 성인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리스도 이후 가장 그리스도답게 살았던 성인으로 평가받는다. 아시시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젊은 날 방탕하게 살기도 했지만 결국 자신의 것을 모두 포기하고 평생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했으며 수도회를 조직해 신앙의 실천에 앞장섰다. 


무엇보다 종교의 권위를 통해 입신양명을 추구했던 당대의 분위기에 반기를 들고 종교를 통해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취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란 본래 신을 위해 현세의 모든 부귀영화를 포기하는 것이 기본적인 이념이었으나 이를 실천했던 이가 중세에는 드물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런 사회적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근본적인 계명을 삶으로 증명한 것이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벅차면서 평온한 기분이 들었다.  일상의 익숙한 공간을 떠나 굳이 고생을 하며 여행을 다니는 까닭은 그 곳에서만 느끼고 감지할 수 있는 정서. 감정, 느낌, 감흥, 사념. 기분, 다짐 등등의 숱한 단어의 구체성이 내게로 들어와 내 안의 온갖 사념들을 가라 앉히고 하나의 단어로 일치를 이루는 순간을 경험하고 싶어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입을 벌려 가장 큰 소리로 낼 수 있는 모음이자 감탄사. 그 감탄사는 내 무의식에서 자연스럽게 터져나온다. 바로 아! 이다.



그러고보니 아시시 (Assis). 아! 하고 자연스럽게 터져나온 감탄사의 이유를 찾는 데는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숙소에다 짐을 풀고 아시시의 저녁을 산책했다. 그리고 발걸음이 멈춘 곳. 아시시의 성클라라 성당 앞마당. 걸터 앉을 수 있는 담 너머로 펼쳐진 움브리아 평원, 성당마다 울리는 종소리, 아이들이 회전목마를 타고 꺄르르 웃는 소리. 분수대의 물소리. 그리고 어르신 순례객들이 모여 나지막히 부른 성가. 이 모든 일상의 평화와 평범함이 어울려 자연스럽게 감탄사가 나왔다. 그 감탄사의 끝에는 아주 간혹 찾아오는 그 단어가 슬며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바로 숭고함과 충만함. 그리고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자체의 온전함. 기뻐서 부르는 노래, 찬미하기 위해 부르는 노래 '찬가'는 아마도 이런 상황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낸 감탄사들의 멜로디였을 것이다. 아시시가 준 첫번째 선물이었다.  



성 프란치스코 '태양의 찬가' 최민순 신부 번역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주여! 
찬미와 영광과 칭송과 온갖 좋은 것이 당신의 것이옵고, 

호올로 당신께만 드려져야 마땅하오니 지존이시여! 
사람은 누구도 당신 이름을 부르기조차 부당하여이다.  
내 주여! 당신의 모든 피조물 그 중에도, 
언니 햇님에게서 찬미를 받으사이다.     
그로 해 낮이 되고 그로써 당신이 우리를 비추시는, 
그 아름다운 몸 장엄한 광채에 번쩍거리며, 
당신의 보람을 지니나이다. 지존이시여!  
달이며 별들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빛 맑고 절묘하고 어여쁜 저들을 하늘에 마련하셨음이니이다.  
언니 바람과 공기와 구름과 개인 날씨, 그리고 
사시사철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저들로써 기르심이니이다. 
쓰임 많고 겸손하고 값지고도 조촐한 누나 
물에게서 내 주여 찬미를 받으시옵소서. 

아리고 재롱되고 힘세고 용감한 언니 불의 찬미함을 
내 주여 받으옵소서. 
그로써 당신은 밤을 밝혀 주시나이다.  
내 주여, 누나요 우리 어미인 땅의 찬미 받으소서. 
그는 우리를 싣고 다스리며 울긋불긋 꽃들과 
풀들과 모든 가지 과일을 낳아 줍니다.  
당신 사랑 까닭에 남을 용서해 주며, 
약함과 괴로움을 견디어 내는 그들에게서 내 주여 찬양받으사이다.  
평화로이 참는 자들이 복되오리니, 
지존이시여! 당신께 면류관을 받으리로소이다.  
내 주여! 목숨 있는 어느 사람도 벗어나지 못하는 
육체의 우리 죽음, 그 누나의 찬미 받으소서.  
죽을 죄 짓고 죽는 저들에게 앙화인지고, 
복되다, 당신의 짝없이 거룩한 뜻 좇아 죽는 자들이여! 
두 번째 죽음이 저들을 해치지 못하리로소이다.  
내 주를 기려 높이 찬양하고 그에게 감사드릴지어다. 
한껏 겸손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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