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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영 Jul 11. 2017

고유명사로 남기기 위하여

이탈리아 아시시 여행기 3

아시시에 머물며 여행 자체를 많이 생각했다. 엄밀히 말해 열흘 남짓 휴가를 얻어 이틀 가량은 오가는 비행기에서 허비하고 고작 일주일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유럽의 몇 곳을 돌아다녔다는 게 여행이라 하기에는 싱거웠다. 자고로 제대로 된 여행이란 최소 한 달은 집을 떠나 낯선 곳이 주는 흥분과 선망한 곳에 닿았다는 감격을 가라 앉히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에 젖어들었을 때부터 시작이란 생각을 갖고 있어서였다.


무엇보다 여행은 감정의 색깔을 세분화하는 과정. 물리적으로 낯선 공간에 가서 희로애락의 4가지 감정만 있을 듯 한 내 마음에 실은 수천 개, 수만 개가 넘는 다양한 감정의 색을 지니고 있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고유명사 또한 숱하게 많음을 깨닫는 게 여행의 혜택이다.


감정과 함께 사고의 흐름에 여러 가지 갈래가 생기도록 이곳저곳 굳어있는 편견을 허무는 일 또한 여행의 혜택이다. 세상에는 오고 가는 통로로서 길이 아니라 각자 처한 환경에 맞는 삶의 길이 있고 그 길은 설령 내가 아는 길과 다르더라도 막다른 길이거나 낭떠러지라고 혹은 제자리 돌기라고 예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 예단이 타인에 대한 억압으로 변질될 수 있다.



아시시를 목적으로 했던 내 여행은 사실 여름휴가 중 비업무용 출장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로마 시대부터 지금까지 2000여 년간 작은 마을. 종교적 신비를 경험하고 현대인들은 그 자체를 비웃기도 하는 신앙을 한 평생 증거 한 성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을 찬찬히 음미하기에는 시간이 짧았다. 그곳 사람들의 아침과 점심, 저녁 그리고 일주일, 또 보름 한 달. 시간의 흐름을 완연히 느끼고 계절의 순환을 어느 정도 감지하는 수준이 되어야 비로소 감정의 빛깔들은 정확히 구분해 하나하나마다 고유명사로 명명할 수 있을 듯싶어서였다


가령 이런 것이다. 매 시간 15분마다 울리는 종소리의 진동이 하지가 하루 지난 아침 7시 동녘의 햇살에 퍼지고 남은 오렌지색 제비가 나뭇잎 사이를 가로지르는 순간 움쩍거린 애벌레의 순한 연두색. 우연히 아침 산책 중 길가 호텔 마당에서 본 무궁화 연파란 보랏빛 꽃잎에 묻어 있는 꽃술의 맑은 노란색. 이런 색들을 눈감고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도록 각인되기에 내 여정은 짧고 표피적이었다.


감정의 색채를 명도와 채도 별로 분분히 구분하고 사유의 동맥경화를 해소하고 오는 일이 여행. 관광이나 여행이나 겉에서 보기에는 집 떠나 낯선 곳에 가서 그곳에 사는 이들에게 타인이 되는 일임에도 사뭇 가져오는 게 다른 건 이런 까닭 때문이다. 여행과 관광의 중간쯤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는 한반도의 평범한 직장인의 삶은 최소 3주 이상 휴가를 내고 여기저기를 다닌다는 그곳 사람들과 비교되어 한편 서글펐다.

머릿속 떠오르는 상념들을 두서없이 수첩에 적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내가 사고하는 언어로 현재의 나를 설명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스스로를 보며 뜬금없이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가 고마웠다. 아마도 중세 라틴어로 미사를 드리던 시기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떠올라서였다.


불과 2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글자를 읽거나 쓸 수 있는 사람은 권력층뿐이었다. 근대 시민혁명으로 계급이 사라지고 문자는 대중 안으로 들어왔다. 중세 교회의 찬란한 성화들은 글자를 모르는 평민들을 위한 어찌 보면 고육책이고 삐딱하게 말하면 '우민화' 정책의 일환. 그런데 그 그림을 그렸던 무명의 화가들은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 마음에 신앙 외에는 모두 악으로 구분하여 죄책감을 가중하던 시기.


그 안에 어떤 열정과 순정과 혹은 당위가 고된 작업을 가능하게 했던 것일까? 또 나는 어떤 열정과 순정과 당위를 바탕으로 무언가를 해보았나?


성 프란치스코 성당 2층의 복원된 프레스코화를 보면서 그렇게 아시시의 오전을 내 것으로 온전히 흡입하기 위해 애를 쓰고 애를 썼다. 어느덧 아시시를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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