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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영 Jul 10. 2017

성 프란치스코도 무궁화를 보았을까

이탈리아 아시시 여행기 2

아시시의 성인 프란치스코는 생전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새들에게도 설교를 했다는 일화가 있다. 아시시에서 머무는 동안 그 일화가 전설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이란 확신이 들었다. 제비를 비롯해 여러 종류의 새들의 지저귐이 들리지 않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시시에서의 이튿날 새벽. 알람 소리가 울리기 전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떴다. 낯선 잠자리였지만 잠은 달았고 깰 때는 개운했다. 새들이 자유분방하게 노래하는 목소리에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생기가 올라오는 느낌. 도심에서는 만끽할 수 없는 여유이고 작은 소도시를 여행하는 특권이었다. 


아침 5시 30분. 전날 밤에 가서 봤던 성 프란치스코 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당에 가기 전 일부러 처음 내렸던 주차장 인근의 길로 돌아서 갔다. 새벽 6시가 조금 넘은 이른 시간이었지만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건네는 인사에 그저 고개만 끄덕이면서 스마트폰 카메라로 여기저기를 촬영하던 중 길가 호텔 담벼락 인근에 눈에 익은 꽃을 봤다. 무궁화였다. 한반도를 벗어나 제대로 본 첫 무궁화였다. 언젠가 무궁화를 심었던 그 호텔의 누군가는 무궁화를 국화로 정한 저 동쪽 작은 나라의 여행객이 새벽녘 아시시를 거닐며 느꼈을 반가운 마음을 상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오히려 관상용으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무궁화가 청정한 모습으로 아시시의 햇살을 반기는 모습을 보니 뭉클거렸다. 꽃의 모양을 보고 감탄사를 내뱉은 적은 많아도 그 자리에 그 꽃이 있다는 이유로 감정의 동요를 경험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문득 프란치스코 성인도 무궁화를 보았을까? 궁금해졌다. 



오전 6시 30분 성 프란치스코 1층 성당에는 수도사들의 성무일도가 있었다. 뒤 자리에 앉아 성무일도에 참여했다. 이탈리어로 진행하는 성무일도에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전례는 없었지만 작은 허밍이나 아니면 우리나라 기도문을 암송하며 참례했다. 파이프오르간 연주와 그레고리안 성가. 세상의 속된 것들은 마치 증발해버린 듯한 그 시공간. 따분하지 않았고 가슴속에 걸려있는 여러 현들이 파동을 일으켰다. '심금을 울리다'는 문장을 몇 번 되뇌었다. 결혼을 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출세를 하고 등등 세속의 인간사를 포기하고 두꺼운 수도복을 입은 채 신 앞에 삶을 헌신한 수도사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 범위를 생각했다. 내가 보고 듣는 세상의 악과 불의와 폭력과 음욕은 광활하지만 정작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의 고요와 평온과 정갈함은 별로 없었구나 싶었다. 어딘가에서 나쁜 일이 벌어지고 인간이 인간으로 인한 절망의 순간들이 펼쳐지고 있다면 또 어딘가에서는 이를 아파하고 삶의 온전함을 구현하려는 사람들, 인간을 위해 신에게 기도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 그 간극 사이에 놓였지만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할지는 자명했다. 


미사는 성무일도보다 수월했다. 한국어로 미사 참례를 따라 했다. 중세 유럽에서는 이러한 미사가 대다수 사람들에게 일상이었고 당위였고 삶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거치고 니체가 말한 대로 '신의 죽음'을 통과하며 가톨릭 교회의 미사는 식사와 같은 보편적인 행위에서 이제 소수가 행하는 예절이나 예식으로 의미가 축소되었다. 하여 이제 그리스도교가 사회이자 국가였던 유럽에서는 미사 전례는 노인들이나 고지식한(?) 이들에게나 의미 있는 행위가 되었다. 유럽의 도시마다 지어진 성당들은 이제 신자들이 찾지 않고 사제가 상주하지 않는 곳들도 많아졌다. 그럼에도 이역만리 저 동쪽에서 온 중년 사내는 미사를 드리며 전율에 떨기도 했다. 



동양, 특히 한국에서 가톨릭은 조선 후기 부패하고 교조적인 유교 질서에 대항하는 일종의 혁명적 가치이자 이념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신자들은 유교적 인의예지를 몸에 지녔던 이들. 또한 한반도의 민간신앙으로 스며든 불교의 자비행을 절로 익혔던 이들. 모든 것에 정성을 기울여야 하고 동티가 나지 않도록 몸과 마음을 조심해야 하고 배고픈 이웃에게는 당연히 밥을 나눠줘야 하고 길 가던 나그네에게는 잠자리를 주던 사람들. 그런 심성을 지녔던 이들. 이런 이들에게 그리스도교, 특히 가톨릭은 다른 곳과 달리 자생했고 순교자의 피로서 열매를 맺는다. 덕분에 나는 예전처럼 종교를 위해 당대 사회와 불화하거나 심지어 목숨을 걸 필요 없이 그 열매를 취한 사람이 됐다.. 


서구는 분명히 동양, 특히 우리나라에 비해 문명을 발전시켰고 당대 비교할 수 없는 풍요를 획득하며 혹은 착쥐하며 세계사의 주역으로 발돋움했다. 그 과정을 단순히 교과서로만 알고 있다가 젊지 않은 나이 유럽에 배낭여행을 하면서 조금이나마 실감하고 놀라고 열등감을 느끼며 종내 괴로웠다. 하지만 아시시에서 새벽 미사를 드리며 개안하는 듯했다. 오히려 나는 동양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에 당신네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흡수함으로써 더욱 풍성해지고 서구의 단일한 시점보다 는 넓은 시점에서 당신네들의 문명을 이헤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구나. 미사를 마치고 성당 의자에 앉아 묵상을 빙자한 졸음의 상태에서 얼핏 든 깨달음이었다. 


성당 지하의 프란치스코 무덤에서 참배를 할 때 맞은편에는 서양의 중년 부인이 지그시 눈을 감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 간절함이 내게는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어 그저 잠시 뒤편 장궤 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갈음했다. 약 1000년 전 살았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실제 유해가 저 너머 안치되었다는 생각을 하니 믿음의 실체를 가벼이 여기면 안 될 텐데 하는 염려가 들었다. 아시시에 오기 전 프란치스코 성인의 오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던 게 생각났다. 그리스도 오상. 현대의학으로는 불가해한 현상. 하지만 성 프란치스코에 감화되어 성 프란치스코 관련 소설을 쓰기도 했던 '그리스인 조르바'의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젊은 날 파리에서 부인을 두고 다른 여인에 마음을 빼앗겼을 때 원인모를 얼굴의 두드러기로 결국 그 여인을 만나지 못한다. 그 증상이 중세 수도사들에게서도 나타나는 병이었다고. 그러니 프란치스코의 오상이 마냥 허구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이렇듯 의심 많은 믿음에 대한 용서를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간구하며 성당을 나왔다.



아시시의 햇살이 벌써부터 광장 앞을 가득채워 분분하고 은은하고 찬란하게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햇살을 몸에 누적시킨 프란치스코 성인의 감상은 훗날 '태양의 찬가'를 통해 응축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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