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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영 Jul 16. 2017

우리의 인연에 대하여

이탈리아 아시시 여행기 4

아시시에 가기 전, 당연히 인터넷으로 숙소 등을 검색했다. 그곳엔 한국인 수녀님이 있는 숙소가 있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전교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순례자의 숙소 혹은 여행자의 숙소로 부르는 곳이었다. 그러나 최소 한 달 전에는 영문 메일을 보내 예약을 해야 하고 남자는 받지 않는다는 후기를 읽으며 어쩔 수 없이 다른 숙소를 잡았다. 


성 프란치스코 성당을 둘러본 다음 숙소로 돌아와 짐을 꾸렸다. 로마로 돌아가는 기차 시간까지 얼추 네다섯 시간 남아 있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전교 수녀회가 운영하는 여행자의 숙소 주소를 확인했다. 미리 연락도 하지 않은 채 불쑥 찾아가 한국 수녀님을 뵙고 싶다고 하면 실례가 아닐까? 선뜻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아시시가 최근 가톨릭 신자 외에 일반인들에게도 알려진 계기는 2013년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자진 사임으로 즉위한 프란치스코 교황 덕도 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어떤 면에서는 상반되는 예수회 소속 사제였다. 그러나 교황에 즉위 한 이후 지금까지 역대 교황 누구도 사용하지 않았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름을 자신의 교황 명으로 정했다. 


2014년 8월 교황 방한 당시 가까이서 그 현장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하고 소박한 삶을 따르려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종교를 가지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도 여러 의미로 감동과 따뜻한 메시지를 주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과거의 성인이라 그 실체를 볼 수 없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올바른 신앙인, 종교 지도자로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물. 프란치스코 교황과 성 프란치스코의 연결 고리 중 하나가 바로 아시시였다. 한국에서 떠나 올 때 프란치스코 교황 관련 책 두 권을 챙겼다. 아시시의 전교 수녀회의 여행자 숙소에 관한 블로그 글을 보니 그곳 책장에 우리말로 나온 여행서적이 몇 권 꽂혀 있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에 관한 책은 없었다. 


몇 번을 망설이다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전교 수녀회 여행자 숙소의 주소를 찾아가 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짧은 영어로 한국에서 온 여행자이며 이곳에 한국 수녀님이 계신다고 해서 뵙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다. 문이 열렸다. 카운터를 보시는 수녀님께서 잠시 기다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5분쯤 지났을까? 한국 수녀님이 나오셨다.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이었지만 송 수녀님은 반갑게 맞아 주셨다. 먼저 남자도 숙소에서 잘 수 있다고 확인해 주셨다. 유럽에는 수녀회나 수도회에서 순례자를 위해 운영하는 숙소들이 있고 이를 일반인에게도 개방해 여행자 숙소로 통칭한다고 한다. 여자만 묵을 수 있는 곳은 6인용 도미토리인데 그것이 와전되어 남자는 사용할 수 없는 것처럼 알려진 듯하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아쉬웠다. 한국인 여행자는 한 달에 10명 남짓 온다고 알려주셨다. 아시시의 전교 수녀회 소속 수녀님들은 약 600명. 전 세계 20여 개 나라에 파견되었고 한국에는 수원에 분원이 있다고 설명해주셨다. 


현재 아시시에 본원에는 한국 수녀님 다섯 분이 계시다고 한다. 여행자의 숙소는 아시시의 전교 수녀회 본원에

서 운영하고 숙소에는 TV가 없고 다른 숙소보다는 약간의 제제가 있다고 한다. 그 대신 50년 동안 주방에서 요리를 담당하신 할머니 수녀님의 손맛을 직접 맛볼 수 있는 식사가 유명하다고 자랑하셨다. 송 수녀님이 추천하는 아시시 여행은 10월. 성 프란치스코 성인 축일을 전후해 중세 유럽의 축제 때처럼 아시시 동네에 여러 가지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11월쯤에는 관광객도 거의 오지 않아 한적하고 고즈넉한 아시시의 모습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고 하셨다. 아시시이와 일대에 프란치스코 성인 관련 유적을 제대로 살펴보려면 일주일 정도 머무는 것이 좋다고 추천하셨다. 


성 프란치스코는 스스로 원하는 것을 누리고 풍요롭게 살 수 있었음에도 종교에 귀의해 수도자의 삶을 산다. 세상의 부귀영화나 온갖 것들을 멀리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의 생애를 따르고자 스스로 홀로의 삶을 선택한다. 송 수녀님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수녀님의 삶과 내 삶 사이에는 분명 서로가 가늠할 수 없는 별개의 영역이 있다. 하지만 그 별개의 영역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 알지 못했던 이들이 같은 신앙을 접점으로 만리타향에서 잠시나마 모국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정서를 교류했다는 사실이다. 어딘가로 떠나게 하는 힘은 그 어딘가에 누군가와의 접점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20여분 가량 송 수녀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떠나기 전 한국에서 가져온 책 두 권을 드렸다. 반가워하셨다. 그리고 인사를 나누었다. 꼭 다시 오라는 배웅을 받으며 숙소 문을 나섰다. 

아시시 역까지는 걸어서 내려왔다. 한 낯의 뜨거운 열기를 고스란히 느끼며 걸었다. 맞은편에서 수녀님과 학생들이 아시시를 향해 걸어가는 모습도 봤다. 해바라기 밭에서는 기어이 사진을 찍었다. 아시시 역 근처의 맥도널드에서 끼니를 채웠다. 한국에서 온 중년층 단체 여행객들께서 앉아 계셨다. 알록달록 등산복 차림이라 금세 알아봤다. 목사님! 하고 부르는 것으로 봐서 개신교 신자들이셨다. 개신교 신자들에게 독신의 수도 생활은 어떤 의미인지 궁금했지만 당연히 가서 물어보진 않았다. 


기차 시간까지 약 40분 남았다. 아시시 역 인근의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 다녀오기는 빠듯한 시간. 하지만 또 언제 올까 싶어 반쯤 뛰다 시 피해서 갔다.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은 트립어드바이저에서 아시시를 다녀간 여행객들이 손꼽는 명소였다. 17세기 초에 지어진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은 성 프란치스코가 숨을 거둔 작은 경당 위에 신바로크 양식으로 지은 대성당. 순례객들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 못지않게 많았다. 성당 내부에 있는 ‘뽀루치웅쿨라’ 성 프란치스코가 세상을 떠난 그 작은 경당에 잠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로마로 돌아오는 기차를 탔다. 폴리뇨에 이르자 사람들이 많이 탔다. 통로 옆쪽의 맞은편 창가 자리에는 아리따운 동양인 처자가 앉았다. 호기심에 눈이 갔다. 한국인 같았다. 여행객의 차림새는 아니었지만 이내 양반다리를 하고 창밖을 보았기 때문이다. 내 앞에 앉았으면 어땠을까? 쓸데없는 상상을 하던 중 내 앞 빈 좌석에 치매를 앓는 듯한 할아버지와 그의 딸로 보이는 중년 아주머니가 앉았다. 할아버지가 엉거주춤하며 자리에 앉는 것이 수월치 않아 보이기에 손을 잡아드렸다. 사람의 촉감은 인종과는 무관하게 똑같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중년 아주머니는 그 차량 안에 유일한 동양인 남자였던 내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기차가 다시 로마 테르미니 역에 도착할 때쯤. 불현듯 생각이 났다. 아시시에서 한국인 송 수녀님과 헤어질 때 했던 말이다. 그때 송 수녀님은 이런 인사말로 나를 배웅해 주셨다. 


“인연이 닿으면 또 만날 수 있겠지요.”


인연이란 불가의 용어. 사람과 사람이 이 생애 만나는 것은 천만 겁의 세월이 쌓여서 가능하다는 것. 가톨릭에서 가장 추앙받는 성인의 고향에서 수도를 하고 있는 한국인 수녀님은 불가의 언어로 인사를 전했다. 우리가 서로 이어져 있다는 ‘연’. 서양 문화에서 그러한 ‘연’은 분명히 익숙하지 않은 개념. 동양의 땅에서, 불교의 영향력이 컸던 문화에서 자란 나와 송 수녀님은 ‘연’이란 단어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전하는 데 어색하지 않았다. 이런 것이 가시적이지 않은 우리의 정신적 유산들은 아닐까? 수백 년, 수천 년 역사를 간직하고 남아 있는 유럽의 유적을 보며 느꼈던 다소 엉뚱한 열등감이 희한하게 사라졌다. 


그리하여 테르미니 역 개찰구로 나가는 동안. 묘하게 내 앞에서 반걸음 정도 계속 앞서가던 기차 안 그 동양인 처자를 추월하기 위해 더 빠른 걸음으로 개찰구 쪽을 향해 바삐 걸음을 옮겼다. 오고 가는 인파로 플랫폼은 이내 북적거렸고 나는 ‘속으로 인연이 닿으면 또 만날 수 있겠지요’란 수녀님의 인사를 계속 중얼거리며 뒤돌아보지 않고 역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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