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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영 Jul 23. 2017

고린토에서 사랑을 되뇌다

그리스 여행기 1

신약성서 구절 중에서 마음에 새기고 있는 구절이 몇 개 있다. 그중 한 구절이 고린도전서 13장. 딱히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닐지라도 널리 알려진 구절이다. 바로 사랑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정의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란 노랫말로 불린 고린도전서 13장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섬에 다녀올까 하다가 끝내 섬으로 가는 여정은 포기했다. 대신 아테네에서 한인 여행사의 가이드 따라 다녀올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을 예약했다. 현지에서는 고린 토스로 부르는 곳. 바로 고린토 유적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고린토는 그리스 펠레포네소스 반도의 북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로 아테네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다. 


그리스가 기원 전후로 로마에 정복을 당한 이후 고린토는 로마의 그리스 식민 행정구역인 아카이아의 수도로 번창하기 시작한다. 에게해와 아드리아해를 지척에 두었던 덕에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했다. 한창 도시가 번성하던 시기에는 오히려 아테네보다 인구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고고학계에서는 고린토의 인구가 최고 30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도 바오로는 개종 이후 그리스도교 최일선의 선교사가 되어 2차 전도여행(50~52년경) 중에 그리스로 건너가 네 개의 지역에 교회를 설립한다. 우선 그리스 북부지역 마케도니아에 필립비 교회, 데살로니카 교회, 베레아 교회를 차례로 새운다. 이후 남부지역 아카이아로 옮겨가서 바로 고린토 교회를 세웠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오로는 1년 반 동안 고린토 지역에서 머무르면서 매우 활발히 선교활동을 펼친다. 바오로는 고린토 교회가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자 이집트 선교를 위해 떠난다.  


바오로가 고린토인들에게 편지를 보낸 시기는 3차 전도여행(53~58년 무렵) 중 소아시아의 에페소에서 머물던 무렵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도행전에서는 바오로가 고린토 교회로 세 통의 편지를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중 두 통은 분실되었고 분실되지 않은 한 통이 바로 고린도전서이다. 그리고 바오로가 에페소를 떠나 그리스 북부지역인 마케도니아에서 다시 한번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서간이 고린도후서이다. 


그리스는 기원 전후 로마의 지배와 함께 바오로 등 사도들의 선교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다. 찬란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문화는 당대 신흥종교였던 그리스도교를  만나 훗날 그리스의 문화의 총화라고 평가받는 동방정교회. 이른바 그리스 정교회의 문화로 부활한다.



그리스를 여행지로 택한 이유는 그리스가 민주주의의 와 유럽 문화의 발화점이란 측면도 있었지만 일종의 순례를 위한 성지여행의 이유도 컸다. 그중 하나가 고린토였다. 바오로는 왜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랑을 강조했을까? 그 사랑이란 게 실은 그리스도교 교리의 핵심이고 완성이다. 하지만 그 사랑의 속성과 본질에 대해서 예수는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오로가 쓴 사랑에 대한 정의가 이를 보완하고 완성했다.  


오전 8시 한인 가이드 투어 프로그램의 승합차를 타고 아테네 시내를 벗어났다. 정신을 차리고 창밖으로 본 그리스의 풍경은 아테네에서 보던 묘한 삭막함과는 또 거리가 있었다. 올리브 나무와 돌로 이룬 골격들이 그대로 보이는 그리스의 산들을 완상 하며 아테네 에서 남서쪽으로 78킬로미터 떨어진 고린토로 향했다. 


그리스에서 30년간 사셨다는 가이드 선생님은 그리스 신화와 그리스의 역사를 차근차근 설명하며 운전을 했다. 예전에 책에서 읽었던 내용들이 마치 처음 드는 내용인양 새록새록했다. 승합차가 처음 멈춘 곳은 고린토 운하. 에게해와 이오니아 해를 연결하는 고린토 운하는 로마시대에도 시도하려다 실패하고 1893년 프랑스에 의해 완성된다. 길이는 6.3km, 넓이는 21m로 세계 3대 운하 중 하나지만 수에즈나 파나마 운하에 비해서는 규모나 활용도가 떨어지는 편이란다. 



바다와 바다를 잇는 운하는 한국에서도 한때 쟁점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운하는 바다와 바다 사이 협소한 지대를 물길로 잇는 것이 아니라 아예 국토를 파 해쳐 새로운 물길을 내는 대공사. 다행히 운하는 진행하지 않았지만 4대 강 사업으로 전환되면서 여러 논란과 갈등을 낳았다. 4대 강 운하에 앞서 공사한 경인운하는 그야말로 세금 먹는 하마로 전락했고 쓸모없는 시설로 사실상 방치된 상황. 


고린토 운하 또한 폭이 좁아 큰 배는 다닐 수 없다고 한다. 과거에는 경제성이 있었는지 몰라도 현재는 요트나 관광선 정도만이 운하를 이용한다고. 그래서였을까? 세계 3대 운하라는 미명만 남았을 뿐 애초 운하를 만들었을 때의 수요와 기능은 거의 상실한 채 기념사진을 찍는 장소로 전락한 운하를 보는 마음이 어딘가 편하지 않았다. 



승합차는 고린토 운하를 떠나 고대 고린 토스 유적지로 향했다. 현제 고린토 시내는 과거 로마시대 지어진 고린토 시내와 떨어진 해안가에 위치해 있다. 몇 번의 천재지변을 거치면서 시가지를 해안 쪽으로 옮겼고 고대 유적은 아직도 발굴을 하는 상황. 고린도 유적은 고대부터 로마시대까지 번창했던 도심 유적이다. B.C 146년 로마군의 침입으로 폐허가 된 고대 도시국가를 B.C 44년 로마 황제 시저가 재건했다.


승합차는 마치 제주도의 삼방산을 열 배 정도 부풀려 놓은 산 아래 고린토 유적지 주차장에 멈췄다. 하늘에서는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가 태양의 기운을 뭉쳐 심심풀이로 인간들의 머리 위로 툭툭 내던지는 것 같았다.   


먼저 고린토 유적지 안의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고대 이집트에서 나온 다양한 유적부터 로마시대의 유적까지 수천 년 역사를 가늠할 수 있는 유물들이 박물관 내부에 가득했다. 전시할 것이 많아 전시물 간 간격이 좁슬 수밖에 없을 듯. 하나하나 찬찬히 들여보기에는 머물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아 대강 눈으로 호사만 누리며 지나쳤다. 도자기와 장식품의 수준은 몇 천 년 전의 사람의 손길이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면서도 모던했다. 


서울에서 가끔 외국 박물관 순회 전시나 기획전시로 본 이집트, 그리스 유물과 비교했을 때 그간 내가 서울에서 본 것들이 무척 작은 일부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유물을 보면서 당시 고린토의 생활을 나름 추측할 수 있었다. 가이드 선생님은 고린토가 로마의 지배 이후 상업이 발달하면서 그에 맞게 온갖 유흥이 넘쳐나던 도시였다고 알려주셨다. 


박물관 바깥으로 나와 고대 고린토의 흔적들을 확인했다. 로마는 그리스 원정 당시 폐허가 되었던 곳을 다시 재건해 펠로폰네소스 반도 내 당대 최첨단 도시로 고린토를 만들었다. 그 흔적들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못지않았던 듯싶었다. 곳곳에 나아 있는 대형 석조물의 잔해들과 도로들, 기둥들은 당시의 도시 모습을 떠올릴 수 있도록 했다. 가이드 선생님은 뒤편의 산이 바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의 전설이 깃든 산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리스 시대 그 산 정상에는 아프로디테 여신을 모시는 신전을 중심으로 한 아크로 고린토가 있었다. 특히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여사제들이 많게는 1000여 명까지 있었는데 이는 거의 그리스 도시국가 최고 수준이었다고. 그 여사제들은 신에 대한 제사뿐만 아니라 남성들에게 육신의 환락을 제공해 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고린토는 로마 시대 이전 고대 그리스 때부터 한마디로 역사와 전통이 있는 유흥의 도시였다는 것이다. 박물관 내에 남자 성기 모양을 한 유물들이 몇 점 있었는데 이는 성병에 대한 경각심을 알려주기 위해 빚은 도기들. 고린토 유적지에서 종종 나오는 유물들이라고 했다. 



유물을 보고 가이드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또 그곳에서 직접 태양과 공기와 하늘을 감지하다 보니 어느덧 사도 바오로가 왜 그곳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재정의하는 서간을 보냈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고린도전서의 내용은 다른 서간보다 특히 성윤리에 대한 내용이 적지 않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른바 '사랑과 전쟁'의 상황에 대한 내용이 많다. 근친혼과 매춘, 이혼, 순결과 독신, 여신도가 지켜야 할 점에 대한 바오로의 한탄과 꾸짖음, 잔소리가 넘친다. 특히 7장에서는 결혼과 이혼 독신 등의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충고들이 나온다. 


짧게나마 고린토의 하늘과 바람과 기운을 느끼면서 그 시절 이곳 사람들은 무엇을 중요시했을까? 싶었다. 상업의 요충지로 돈이 넘쳤고 날씨는 연중 따뜻하고 건조했다. 세상에 걱정할 일이라곤 외부의 침입 밖에 없었으나 이 역시 모두 지나가 버리는 일. 고린토를 비롯해 그리스 지중해 연안 도시는 일종의 유토피아였을 것이다. 


날은 좋아 사람들은 저마다 몸이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고 여인들은 꾸몄으며 남성들은 근력을 키웠다. 양식은 풍부했고 포도는 넘쳐 술은 흔했다. 그렇다면 인간의 관심은 육신의 쾌락으로 집중되었을 것이다. 그 쾌락을 '사랑'으로 등치 시키거나 혼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상대를 쾌락의 대상으로 삼았을 때 그 온전한 완성을 이루지 못한다. 오히려 사랑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혼란과 카오스를 가져온다. 집착이 되고 욕망이 되고 질투가 나고 시샘이 일고 결국엔 파국으로 치닫는다. 남자와 여자,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가 시도 때도 없이  서로 발정하고 그 발정을 사랑이란 이름을 빌려 육체를 통해 합리화한다. 그러나 인간은 서로의 관계에 윤리가 개입되지 않는다면 스스로 붕괴한다. 그리스 신화의 많은 내용들은 그 윤리가 있기 이전의 사회에서 잉태한 비극들을 후손들에게 경고하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다.  



바오로의 설교는 아마도 이랬을 것이다. 사랑이란 발정 해 서로 탐닉하는 쾌락이 아니라고.  진정한 사랑을 통해 관계의 파국을 막고 평화와 나눔의 공공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그렇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을 정의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의 정의는 그런 맥락에서 나온 글들이 아니었을까?


고린토 유적지는 사도 바오로의 발자취가 있는 곳. 그가 걸었던 고린토 시내의 돌길이나 잠시 앉아서 쉬었을 건물이 있었던 곳. 종교적 체험 이후 오직 타인을 위해 삶의 모든 것을 건 사내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 그리고 2000여 년 동안 사람들이 가장 많이 되뇌는 사랑에 대한 정의를 고뇌하게 만들었던 곳. 하여 사도 바오로가 사랑을 저 원시의 시대의 발정의 장식품에서 인간이 지닌 숭고한 가치로 끌어올리고 사랑을 애욕이나 욕정의 한계에서 해방시켜 삶의 지침이자 천국을 위한 교리로 승화시킨 계기를 만들어 준 곳. 일행이 있어 찬찬히 이를 묵상할 시간은 없었지만 스마트폰에 담겨 있는 성서 앱을 통해 오랜만에 다시 고린도전서 13장을 찾아 읽어보았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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