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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영 Jul 30. 2017

메테오라,때로는 여행이 아니라 방황

그리스 여행기 3 

1.
어렸을 적부터 독신을 꿈꾼 이들이 있다. 혹은 철 들어 독신을 꿈꾼 이들도 있다. 이들에게 독신은 그저 미혼인 상태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위해 자신의 삶을 평생 봉헌하는 과정. 오직 신앙을 위해 처와 자식을 혹은 남편과 자식을 자신의 인생안에 지운 사람들. 그 빈 공간을 신에 대한 찬미와 흠승과 스스로 고행과 가난과 또 본질적인 외로움과 인간사의 허망함으로 채운 이들.


동양에서는 불가의 스님들이 사바세계의 인연을 끊고 출가해 속세와 다른 삶을 살았다. 서양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수도사들이 세속의 욕망을 버리고 수도원에 들어가 삶을 규율에 맞춰 살았다. 스님이나 수도사나 독신을 선택한 이들. 마흔 넘어 홀로 살고 있는 내 처지에 스님이나 수도사들의 삶은 한편으로는 막연한 동경의 세계이자 넘보지 말아야 할 금단의 세계이기도 하다.


2.
그리스는 유럽 문명이 발원한 곳이기도 하지만 기독교 문명이 로마 가톨릭과 달리 독자적인 문화로 발전한 국가이기도 하다. 1054년 신성로마제국과 동로마제국이 분리하면서 그리스정교는 독자적인 기독교 문화를 만들어 간다. 로마 교황을 승인하지 않은 그리스정교는 로마 가톨릭에 비해 상징적이고 신비적인 경향이 강하다.


서양의 르네상스가 가능했던 이유는 동로마 제국이 1453년 오스만 제국에 패하면서 그리스정교회 소속 수도사들이 대거 서유럽으로 망명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정교의 수도사들은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켜켜이 쌓아온 자신들의 학문적 성과를 가지고 서유럽으로 넘어왔다. 그 과정에서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문학이 서유럽에 영향을 끼쳤고 이를 바탕으로 서양은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동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지중해 패권을 놓치면서 서양은 새로운 항로를 찾아 대서양을 건넜고 이는 결국 세계사의 추를 서양으로 옮긴 대항해시대의 서막이었다.


메테오라에 가기 전 젊은 가이드는 예전 교과서에서 배웠던 서양사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었다. 이러한 맥락을 알아야 메테오라를 한층 더 깊이 알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메테오라는 아테네에서 북서쪽으로 350km 떨어진 곳으로 핀토스 산맥과 페네이오스 강 근처 테살리아 평야의 북서쪽 끝에 자리잡고 있다. 메테오라의 뜻은 그리스 어로 '공중에 떠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지금은 칼람바카와 카스트라키 마을 사이에 있는 산 중턱 바위마다 있는 수도원. 즉 이슬람 세력의 진출을 피해 종교적인 자유를 찾고자 몰려들었던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사들이 지은 '공중수도원'을 뜻하는 고유명사로 자리를 잡았다.


수천만년 전 바다였던 메테오라 지역은 바닷물이 빠지면서 거대한 사암으로 이뤄진 돌기둥 같은 봉우리들이 남았다. 11세기무렵 그리스에 이슬람을 믿는 오스만 제국이 쳐들어오면서 그리스정교회 수도사들은 인적이 닿지 않을 곳을 찾아나섰다. 그리고 마치 허공에 떠 있는 섬처럼 보이는 칼람바카 지역의 바위절벽들을 보고 신앙의 은신처를 만들기로 한다. 바위 절벽 상단은 평평해 건물을 지을만 했다. 수도사들은 먼저 메테오라 지역의 동굴에서 은거하면서 사다리와 밧줄 도르레를 이용해 바위 절벽 위로 올라 수도원을 만든다. 14세기 무렵에는 수도원이 20여개 생겼다. 바위절벽, 돌기둥 위의 천연오세와 같은 수도원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무원이었다. 수도사들은 그곳에서 자급자족을 하며 공동체를 이어갔다. 정교회의 전통을 이어 성경을 필사하고 학문을 연구하고 기도했다.


3.
메테오라 아래의 칼람바카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8시가 넘어서였다. 섬머타임으로 아직 어둠이 밀려오기 전. 숙소에 여장을 풀고 칼람바카 시내로 끼니도 먹을 겸 마실을 나갔다. 우리로 치면 읍내 정도의 규모인 칼람바카는 관광객들로 적잖이 떠들석했지만 그렇다고 요란하거나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분수대가 있는 마을 광장에는 동네 아이들이 제각기 뛰어노느라 정신이 없었고 장사를 하는 마을 주민들은 그네들에게 어떤 잔소리도 하지 않았다.



작은 읍네였지만 약 500미터 정도에 이르는 중심도로에는 제법 눈길이 가는 카페와 음식점이 적지 않았다. 홀로 끼니를 먹을 곳이 마땅치 않아 몇 번을 두리번 거리다가 케밥을 파는 현지 패스트푸드 가게에 들어갔다. 다른 매장에 비해 손님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가게 매장 안의 TV프로그램이 나오는 대형 디스플레이는 한국 대기업 제품이었다. 늘 보던 로고를 이곳에서 보니 새삼 반가웠다. 5유로에 어른 손바닥 두 개만한 크기의 케밥과 맥주 한 캔을 마실수 있었다.


칼람바카가 메테오라 보다 먼저 형성된 마을인지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어찌되었든 칼람바카는 한국 식으로 하면 큰 절 밑에 있는 사하촌. 칼람바카 뒤로 보이는 메테오라의 수도원 한 곳은 조명을 받아 홀로 등대처럼 빛을 내고 있었다. 케밥을 먹은 뒤 그리스 요거트 사들고 마을의 중앙 광장 아이들이 뛰노는 곳에서 관광객으로 북적거리는 작은 읍내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대부분 가족이나 친구, 연인끼리 온 관광객들은 길거리에 펼쳐진 식탁에 앉아 저마다의 언어들로 속세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4.
수 백년전 저 산꼭대기 바위절벽 위에 수도원을 짓고 그곳에서 평생 나오지 않고 살았던 수도사들은 과연 속세의 일상은 어떤 의미였을지 문득 궁금했다.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장성한 모습을 보고 또 병들고 아프고 그러다 눈을 감는 삶의 과정은 그들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던 것인가? 바쁜 일상 속에서 여러가지 스트레스와 굴욕과 비참과 혹은 탐욕과 경쟁을 견뎌낸 이후 짧은 자유의 시간. 소중한 이들과 함께 휴가를 떠나 낯선 곳에서의 경이와 설렘과 흥분과 즐거움을 서로 나누는 시간들이 동시사방에서 펼쳐지는 그 곳에서 속세의 삶과 속세를 벗어난 삶의 간극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간극 사이에서 어느쪽이든 선택하지 못하는 주저함 탓에 평생을 홀로 살 수도 있음을 상기했다.


숙소로 들어가기 전 호텔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아 멀리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메테오라의 수도사들은 밤마다 밤하늘을 보며 별자리를 확인하고 또 그 별자리 넘어에 거룩한 신성이 깃들어 있을거라 마음 가다듬고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혹은 메테오라 아래 칼람바카에 살았던 어떤 가장은 밤하늘의 별을 보며 가족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했을 것이다. 둘의 처지는 달랐지만 하나는 같았다. 인생의 방향을 정했고 그 방향에 대해 각자 갈 길을 갔다는 점. 그들은 인생의 목적이 있었고 그 목적에 따라 주어진 의무를 행하고 그 길을 걸었다. 



정작 자유롭게 여행을 온 것은 나이건만 내 여행은 여행이 아니라 아직 목적지를 정하지 못한 방랑이나 방황은 아니었을까? 삶의 구체적인 방향이나 가시적인 목적이 없다는 게 갑자기 구체적으로 훅 하고 들어왔다.  홀로 마시려 사왔던 맥주를 끝내 다 마시지 못한 채 한참을 그 벤치에 망연히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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