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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영 Jun 08. 2016

오사카, 도쿄에 없는 여유를.

무작정 떠난 오사카·교토 2박 3일 여행기 '상'

여름철 성수기를 피해 휴가를 잡았다. 딱히 계획을 세우지 않은 채였다. 사실 귀찮았다. 어느덧 휴가라고 어디를 가기 위해 궁리하는 게 피곤했다. 최근에는 선택장애까지 생겨 무엇을 고르거나 결정하는 데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잦았다. 여행을 위해 항공편부터 숙소까지 이것저것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싶지 않았다. 가고 싶은 곳도 없었다. 지리산 종주를 다시 할까 싶었지만 음력 보름의 벽소령 달빛을 볼 수 없었기에 마음이 가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변덕이 생겨 지인들이 있는 제주행을 선택했다. 간 김에 지인들 만나고 한라산 영실코스나 사려니 숲길을 걷다 오려했다. 고민할게 별로 없는 일정을 짰다. 하지만 봄에서 여름의 제주는 몇 번 가봤던 지라 크게 매력적이진 않았다.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선망이 아직 큰 탓이었다.


휴가 중임에도 재택근무와 다름없는 이틀을 보냈다. 업무를 처리하면서 욕도 함께 튀어나왔다. 휴가 전날 예매한 제주행 항공권은 결국 취소해야 했다. 취소하러 들어간 항공사 사이트에서 우연히 특가 항공권을 봤다. 오사카까지 왕복 15만5000원. 비행시간도 1시간 40여분. 크게 부담되지 않았다.



마침 일본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교토와 오사카는 지척. 충동적으로 오사카행 항공권을 결제했다. 오사카의 숙소도 10여분 만에 구했다. 교토의 숙소는 가서 정하기로 했다. 홧김에 무슨 질 한다는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비행기 출발 시간은 수요일 오전 8시. 그러나 화요일 자정이 넘기도록 업무는 마무리하지 못했다. 


결국 업무는 미완으로 남겨 놓고 잠들었다. 새벽 4시 40분에 일어나 대충 짐을 챙겼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공항으로 가려던 계획을 바꿨다. 새벽 5시 20분. 차를 몰고 외곽순환고속도로를 탔다. 한 시간 만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한적한 공항을 예상했지만 오산이었다. 북적거렸다. 오전 7시 30분. 인천공항 102번 탑승구에 도착했다. 딱 맞춰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만약 대중교통을 이용했더라면 자칫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일본은 네 번째다. 세 번 모두 출장으로 다녀왔다. 목적지는 도쿄였다. 그때 도쿄에서 느꼈던 의아함은 유럽 여행에서 풀렸다. 일본은 ‘탈아입구’ 유럽을 모델로 근대국가를 추구했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사실을 유럽에 가보니 실감이 났다. 도쿄의 곳곳은 유럽 근대 건물들의 복제였다. 



18세기와 19세기 일본의 선각자들이 유럽에서 어떤 충격을 느끼고 또 어떻게 자신들의 나라를 개조했는지 능히 짐작이 됐다. 책에서 배웠던 세계사의 흐름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계기였다. 당시 조선은 세계사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 지점에서 지금의 한일 간 격차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우리 역사에 대한 복잡하고 애잔한 감정도 깊어졌다. 이후 일본 문화의 본류에 관심이 갔다. 교토는 그때부터 가보고 싶은 도시가 됐다. 1000년에 걸친 일본의 수도. 그곳은 일본문화 원형의 무엇이 있을 듯싶었다. 


만 하루 동안 주마가편으로 둘러본 오사카는 도쿄에 비해서 확실히 도심의 틈새가 보였다. 그 틈새 사이로 여유가 있었고 한적함이 있었다. 시청 근처 공원 곳곳에는 한낮임에도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고 도심의 직장인들의 걸음걸이도 덜 빨랐다. 촘촘히 송곳을 세워놓은 듯했던 도쿄의 스카이라인과 달리 오사카의 스카이라인은 치열하지 않았다. 듬성듬성 높은 건물들이 있었지만 도심 중심의 오사카성을 에워싸 스스로의 역사를 초라하게 만들지 않았다. 오사카성 주변 도심을 걷다가 든 생각이다.



만약에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세계사가 전개되었을까. 일본은 왜 전쟁을 일으켜 동북아의 평화를 가로막았을까. 오사카성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상을 보며 속으로 아름답지 못한 말들을 되뇌었다.


숙소는 호텔이라기보다 콘도에 더 가까웠다. 주방이 있고 싱크대 안에는 식기들이 있었다. 아마도 오사카 도심의 아파트가 이러한 구조일 듯싶다. 덕분에 정말 오사카에 여행 온 객이 아니라 여기서 유학생활이라도 하는 학생 인양 분위기를 낼 수 있었다.


가까운 곳에 식음료품을 파는 슈퍼마켓이 있어 장을 봐왔다. 일본 라멘을 끓여 저녁을 해결했다. 와이파이로 집에서 늘 듣던 CBS FM을 인터넷으로 들었다. 카톡을 확인하니 부장께서 업무 수정을 하라고 지시를 해놓으셨다. 밤에 시내에 나가볼까 했지만 접었다. 시내는 서울이나 여기나 거기서 거기라고 속으로 무언가 스멀거리는 억울함을 눌렀다. 부장이 지시한 업무를 수정하고 한국에서 처리하지 못한 일을 마무리했다. 휴가가 아니라 일상의 연장인 듯했다. 그래도 분명히 다른 느낌과 감정이 들었다. 종일 들었던 말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본어였던 덕이다.    


한반도를 벗어나 외국에 나오면 좋은 것은 아마 이런 점이다. 내가 사고하는 언어가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오는 생경함. 낯섦. 여기에 뇌는 무척 흥미를 보인다. 긴장과 함께 집단 속 개별성을 인지하면서 같은 일상일지라도 색다르게 받아들이면서 살짝 ‘각성’ 한다. 


먹고 자고 일하고 일상의 과정 자체는 세상 어디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문화와 언어가 다른 상황 속에 놓여 내 안에 내재된 언어와 문화를 자연스럽게 비교하면서 아! 내가 이곳에서는 독자성을 지닌 인간이구나. 은연중 환기하는 그 자극이 짧은 외국 여행에서 느끼는 가장 큰 매력이다. 


그 매력에 홀려 뇌는 호기심 활성화 모드에 들어간다. ‘이곳은 왜 이런 문화가 있을까? 이곳은 왜 내가 있는 그곳과 어떤 이유로 차이가 있나? 같은 의미인데 왜 다른 기표로 표현될까?’ 그런 궁리를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내가 참 작은 존재인 듯싶고 역으로 내가 이곳에서 특별한 존재인 듯싶다. 그들은 또 내가 하는 한국어를 이해하기 어려울 테니.  



한나절 오사카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교토로 갈 계획을 세웠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교토까지 확장되어 있었다. 교토에 가서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을 보고 기요미즈테라에 들를 예정이다. 그리고 이왕이면 육첩방에 누워 윤동주와 정지용의 시를 읽고 다음날 도지새대 교정에 있는 시비에 가서 술 한 잔 따르고 올 테다. 


휴가를 떠나기 전부터 오사카에서 생애 첫 밤을 보낼 때까지 일상과 휴가가 뒤섞인 시간들을 끼적끼적 적다 보니 자정을 넘겼다. 역시 무언가의 의미나 행복도 이렇게 꺼내어 언어로 구체화시키지 않으면 그 내밀함을 만끽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게 새삼스러워 마지막 맥주 한 캔을 들고 베란다에 나와 흑 은빛으로 유영하는 구름에 건배를 했다. 


종일 푸르렀던 오사카의 하늘은 어느새 맑은 먹물빛으로 담백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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