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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영 May 08. 2016

봉화, 내 안에 외딴 곳

지금은 운영하지 않는 봉화 청량사 템플스테이 후기

"혹시 노통 보러 가시나요?"

"아! 경남 봉하가 아니라 경북 봉화입니다."


경북 봉화군 명호면 청량산에 신라 때 창건된 청량사가 있다. 휴가기간 중 그곳에 2박 3일 템플스테이를 하러 간다고 주변에 말했을 때, 어떤 이들은 봉화를 봉하로 잘못 알아들었다. 그만큼 봉화는 덜 알려진 곳이기 때문이다. 강원도 최남단과 경북 최북단의 경계, 서울에서 직선거리로는 300킬로미터 남짓이나 그보다 더 먼 부산보다 시간이 더 걸리는 곳. 영화 '워낭소리'의 흥행으로 조금 알려졌을 뿐, 아직도 서울 면적 2배의 봉화군은 조그만 부락인 봉하와 헷갈릴 만큼 많은 이들에게 익숙하지 않다.


몇 해 전부터 휴가 중에 막연히 템플스테이, 산사 머물기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다. 천주교 신자인지라 수도원으로 피정을 가는 게 맞겠지만, 그 이전에 한반도에서 태어난 내 안에 유전되고 있을 불가의 분위기에 젖어보고 싶은 바람이 컸다. 


마침 신문을 보다가 전국 각 사찰에서 진행 중인 템플스테이 소개 기사를 봤다. 그중 청량사의 템플스테이에 눈길이 멈췄다. 일단은 소개된 사찰 중 내가 아는 견지에서 가장 오지라는 점이 맘에 들었다. 그리고 별다른 프로그램이 없는 휴식형 템플스테이라는 점도 끌렸다. 


경북 봉화 청량산 초입ⓒ월영


서울에서 출발하는 날, 하늘은 여전히 흐리멍덩하였다. 오락가락하는 비와 습기를 머금은 바람은 미적지근한 사우나처럼 음습했다. 고속도로를 타고 영주쯤 오다 보니 날이 개기 시작했다. 풍기를 거쳐 울진으로 넘어가는 36번 국도를 이용해 봉화에 도착, 갈림길에서 35번 국도로 갈아타고 20여분 쯤 달리다 보니 낙동강 상류가 나왔고 길옆으로는 절벽과 소나무가 어우러진 비경이 이어졌다. 감탄사를 내뱉으며 운전했다 시속은 절로 느려졌다. 다행히 뒤따르는 차가 없어 마냥 천천히 갔다. 그러던 중에 청량산 도립공원 초입과 마주쳤다.


청량사로 오르는 길은 가팔랐다. 20여분 급경사의 길을 오르니 종아리와 허벅지의 근육이 당겼다. 무엇보다 숨이 가빴다. 거의 기진맥진할 무렵, 청량사 입구가 나왔다. 날은 개어 신록이 울창한 청량사는 뒤편 우뚝 솟은 봉우리들과 어우러져 마치 무협영화에서나 본 듯한 사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입구 사찰 안내판 옆에 약수로 목을 축인 뒤 템플스테이 사무실을 찾았다. 내어주는 옷을 가지고 후원 숙소로 갔다. 템플스테이를 위해 최근 지어진 시설들이라 단정하고 깨끗했다. 샤워시설과 식당도 깔끔했다. 다소나마 불편을 감내하겠다던 다짐은 기우였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승복은 아니었지만 스님들이 일상생활에서 입는 옷과 딱히 차이가 없는 옷이었다. 템플스테이를 진행하는 권 보살님은 나를 처사님으로 불렸다. 수도원 피정이었다면 형제님으로 불렸을 텐데. 혼자 웃음이 났다.


주의사항은 별게 없었다. 아침, 점심, 저녁 봉양 시간 외에는 식사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 스님들이 계시니 조용히 다닐 것. 본래 밤 9시나 10시에 취침을 해야 하지만 꼭 그 시간에 숙소에서 잠을 청하지 않아도 된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전에 왔던 어떤 사람은 2박 3일 동안 내내 밥 먹고 잠만 자다 갔다는 말도 했다. 아침에 일어나 산행을 다녀오거나 예불을 하거나 모든 것이 자기 마음이었다.

 ⓒ월영


첫 날밤. 태어나 처음으로 예불을 드렸다. 청량사 유리보전은 우리나라 거의 유일의 종이로 만들어진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있는 법당이었다. 유리보전에는 약사여래불 외에 문수보살과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었다. 생각보다 예불 시간은 길지 않았다. 수도원 피정에서 성무일도를 했던 기억이 났다. 하루의 시작과 정점, 그리고 마무리할 시간에 기도를 하는 삶은 수도의 기본. 비록 형식과 전통은 달라도 불심이나 하느님께 기도를 하는 그 마음 자체는 같다고 생각하기에 별다른 거부감 없이 스님 하시는 대로 예불에 참여했다. 목탁소리의 울림이 여린박자로 마음을 두드렸다. 그 두드림이 뭉친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처럼 몽근몽근 시원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의 읇조림은 평안했다.

 

이어진 차담 시간. 하룻밤, 혹은 이틀 밤. 그곳에서 함께 머무를 다른 분들과 함께 차를 마시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누구인지, 남이 누구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아들과 함께 온 아버지도 있었고 휴가기간 혼자 온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각자의 사연보다 그저 이런 시간에 이렇게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여유와 공감이 중요했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들이란 무릇 그런 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유리보전 앞에 5층 석탑과 불상, 그곳 주변에는 마루가 깔려있었다. 보름 전의 달빛은 반달이었지만 교교하고 밝았다. 권 보살님은 거기 누워서 별을 보는 것도 좋다고 했다. 감히 부처님 앞에 드러눕는다는 걸 상상하지 못했기에 권 보살님의 말씀이 신선했다. 법당의 불이 꺼지고 산사의 하루가 완전히 저물었을 때, 바람막이 하나를 걸쳐 입고 그 마루에 앉았다 이내 누었다.


건너편 산 정상 위로는 흐르는 구름과 달빛이 어울려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소나무를 지나는 바람소리와, 갈참나무를 감싸는 바람소리, 밤나무를 달래는 바람소리, 단풍나무를 두드리는 바람소리가 각기 다르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달빛은 단 한 번의 깜박임 없이 나를 지켜봤다. 그 달빛에 여려진 하늘에는 몇 개의 별이 송송거렸고 그 반대편 산봉우리로는 마실 나온 별들이 저마다 총총. 무념무상이 잠시 내게 허락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문득, 그레고리안 성가가 담겨있는 엠피쓰리가 생각났다. 자연이 들려준 소리에 조금 물릴 무렵, 유럽의 수도원 수사들이 부른 그레고리안 성가를 들었다. 청승맞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산사의 어둠에 묻혀 듣는 그레고리안 성가는 각별했다.

 

불교의 승려나 천주교의 수사나 남성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이겨내며 깨달음을 위해, 혹은 신과의 소통을 위해 정진할 터. 그들이 고행의 삶을 그래도 이겨낼 수 있는 건. 이처럼 자연과 교감하며 스스로의 부질없음을 끝없이 각인하고 각인하는 과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미루어 생각했다. 그리고 무척 다행스럽게도 따뜻한 눈동자, 소소한 미소, 언뜻언뜻 닿는 체온의 떨림을 그리워하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발심과 수도의 유혹은 그저 내 안의 어떤 호기심일 뿐 내 진정 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다. 숙소에서 잠들며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꿈속에서는 사바세계의 보고 싶은 인연이 현몽했다.


 ⓒ월영

이튿날은 내내 비가 왔다. 덕분에 운치가 넘치는 산사의 하루를 보냈다.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다양하다는 것도 알았다. 졸릴 때는 잤다. 글을 쓰고 싶을 때는 가져온 노트에 주절주절 적었다. 그렇게 한나절 보내고 청량사의 암자인 뒤편 응진전에 가서 스님과 한담도 나눴다. 농사를 짓는 응진전의 스님은 속세에 있을 때 공수부대에서 복무했다고 한다. 스님의 성정은 야생의 무엇과 닮아있었다. 몇 년간 농사에 매진하며 불심을 닦는 스님의 모습은 농활 때 뵙던 농민회 형님들과 다름없어 친근했다. 책을 멀리하라던 성철 큰스님의 말씀이 떠오르기도 했다. 스님이 직접 재배하신 고추, 상추, 깻잎에 담근 된장으로 식사를 하는 호사도 누렸다. 그런 호사를 누린 템플스테이 참가자는 별로 없다는 게 권 보살님의 말이었다.

 

호사는 밤까지 이어졌다. 응진전 스님은 암자에서의 하룻밤도 괜찮다면 머물다 가라 했다. 하여 황토로 된 쪽방에 참나무로 군불을 지폈다. 모처럼 아궁이 앞에 앉아 온돌을 덥히니 좋았다. 사그락 사그락 타들어가는 참나무의 모습을 스마트폰 동영상으로 담았다. 내 마음이 추운 날에 그 동영상을 보며 그때의 온기를 상기시키자는 마음에서였다.


응진전 스님은 암자 생활의 적적함도 털어놨고 속세 돌아가는 것에 울분도 털어놨다. 인기척이 없는 겨울 산 속의 생활에 대해, 이리저리 인간의 탐욕에 의해 병들어가는 자연에 대해 스님의 목소리는 컸다. 무릇 수도생활도 그럴 것 같았다. 결국 아귀다툼의 속세를 떠나도 끝내 수도자들의 발원은 속세의 중생, 세속의 범부들의 화평과 구제로 회귀되는 것이 아닐까? 세상과 절연한 채 산속에 들어갔던 법정스님의 글들도 끝내 스스로를 위한 게 아니라 사바세계 읽는 독자를 향했던 것처럼.

 

비가 잠시 잦아들고 안개가 무릉 피어날 때, 응진전 스님과 함께 갔던 분들에게 인사를 하고 밤길 산속을 걸어 숙소로 왔다. 종일 채운 듯했지만 마음이 텅텅거렸다. 첫날밤과 달리 잠이 달게 왔다. 꿈은 꾸지 않았다.


 

마지막 날 새벽. 둘째 날 만큼 비는 내리지 않았다. 스쳐가는 빗줄기가 계속 흰 물감을 풀어 청량산 산자락에 휙휙 붓질을 했다. 어제 담지 못한 풍경을 담겠다며 카메라를 들었다. 운 좋게 다람쥐도 찍고 봉숭아도 찍고 혼자 셀프 카메라로 이른바 인증샷도 찍었다. 그리고 미뤄두었던 절 초입 전통찻집에 갔다. 조그만 서가에는 책들이 꽂혀 있었다. 의외로 좋은 책이 많아 이것저것 꺼내 읽었다. 그중 마지막까지 손에 들었던 책은 `산사에서 부치는 편지`였다.


그 책은 큰 스님들이 서로에게 보냈던 서찰들을 엮은 책이었다. 경허, 만봉, 고봉, 경봉, 한용운, 성철 등등 근대와 현대 한국 불교의 법통을 이어온 큰 스님들의 편지들이 담겨있었다. 한 겨울 산사에서 이 세상 고요와 싸우며 용맹정진할 때, 어머니에 대한 연민으로 스스로를 괴로울 때, 잡히지 않는 화두로 깊고 깊은 우울에 빠졌을 때, 부처의 뜻을 깨닫기 위해 만행을 떠났을 때 심정이 담긴 편지들은 한 편 한 편이 서정시였고 서사시였고 절창이었다. 특히 스스로를 수련하는 영혼들의 교감은 또 지극히 인간적이라 뭉클했다. 그중 두 편의 편지에 계속 눈길이 머물렀다.


물과 산

-용성 스님이 경봉 스님에게 


물과 산은 제 모습이요

꽃과 풀은 제 뜻이로다

한가로이 지고 피 오고 가니

밝은 달 비치고 맑은 바람이 불어오네 



마음의 소리

-경봉 스님이 적음 스님에게 


적음(寂音)이라, 고요 속에 소리가 있네.

그대 법명은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대숲 흔드는 소리.

아아, 귀를 간지럽히는 이슬 구르는 소리.

모두가 다 적음이니 이 어찌 또한 아름답지 않은가.

복잡한 삶에 이 애끓는 소리를 듣는 이 있으니 그대 얼마나 행복한가.

높이 살던 새가 떨어지는 소리도 다 적음이니

인생만사 다 소리 때문에 흥하고 망하니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시게


 

점심 공양을 끝으로 2박 3일간의 청량사 템플스테이는 마무리됐다. 하루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규정상 2박 3일까지만 받는다고 한다. 권 보살님은 가을과 겨울이 더 좋다며 그때 다시 한 번 오라는 말과 함께 합장으로 배웅했다. 하산 길에 같이 지냈던 보살님과 간단히 소감을 나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머묾이 좋다는 데 공감했다.


주차장에서 짐을 정리하고 꺼놨던 휴대폰을 켰다. 그간 수신하지 않았던 문자메시지가 계속 밀려들어왔다. 다시 휴대폰을 꺼버릴까 하는 마음이었지만 참았다. 나를 찾는 이들. 그들과의 인연이 속세의 업이고 속세의 의무. 속세의 고통이고 또 속세의 행복이며 의미일 터. 하여 속세의 아귀다툼에서도 악귀가 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 다짐이 또 얼마나 빨리 퇴색하고 마음의 저 먼 곳으로 밀려날지 짐작되었지만. 그렇게 지치고 때가 묻었을 때 예수가 "여러분은 따로 어디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도록 하시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나만의 좋은 외딴곳을 마련해 놓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어느새 휘파람을 불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입추를 지난 햇볕이 듬성듬성 구름 사이로 얼굴을 비췄다. 청량사 입구 산길. 살짝 들뜬 표정의 사람들이 가벼운 걸음으로 녹음인양 숲속으로 사라져갔다. 



현재 청량사는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지 않다. 청량사 홈페이지에는 "청량사는 기도도량으로서 면모를 갖추기 위하여 템플스테이를 운영하지 않음을 알려드립니다. 궁금하시거나 문의사항이 있으시면 청량사로 전화주시기 바랍니다"고 공지가 올라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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