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가지 조건이 있었다. 우선 집에서 종일 돌봐줄 사람이 없으니 아기 고양이는 제외였다. 또 집안에 책이 많고 넓지 않아서 활동성이 높은 고양이도 같이 살기 어려울 듯했다. 여기에 성묘였을 때 7~9킬로가 나갈 수 있는 고양이도 키우기가 곤란할 듯싶었다. 혼자서 비교적 잘 지내고 조용한 고양이가 적합. 코리안 숏헤어라 불리는 길냥이들은 그런 면에서 검증하기기 쉽지 않았다.
딱히 품종묘를 고르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고양이 관련 사이트와 책을 뒤지면서 품종묘들의 특징을 살폈다. 처음에는 샴고양이나 러시안블루가 끌렸다. 그러나 두 품종묘들이 나름 활동적이라고 해서 마음을 접었다. 그렇게 포인핸드와 페이스북의 '길고양이 임보'와 '길고양이와 친구'들 페이지를 1년여 들락거렸다. 조건에 맞는 유기묘가 간혹 있었지만 또 고양이를 키우겠다는 마음도 고양이 변덕 인양 여러 번 왔다 갔다 했다.
올 초여름부터 동네 길냥이들을 주말마다 찾아다니며 놀아주다 보니 어느 정도 확신이 생겼다. 그리고 여름이 지났고 8월 초순께 페이스북의 길고양이 임보 페이지에서 녀석을 봤다. 찾고 있던 페르시안 친칠라. 연락을 했다.
사연이 있었다. 일산의 모 쇼핑몰에서 출근하던 젊은 여성 직장인이 우연히 녀석을 봤단다. 집에서 코리안 숏헤어를 키우고 있던 그 여성은 꾀죄죄하게 구석에 숨어있는 녀석을 보고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멈춰졌다고 한다. 그게 6월 초. 고양이를 키우는 아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부탁을 하고 퇴근길에 다시 찾으러 왔다고 한다. 그때 녀석은 인근 식당 아줌마에게 구조가 되어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처음 녀석을 봤던 여성과 그 후배는 수소문을 해서 식당 아줌마와 연락이 닿았고 식당 아줌마는 키울 수 없는 환경이라 녀석을 맡겼다고 한다.
이후 혹시나 집을 나온 냥이가 아닐까 싶어 여기저기 고양이 카페 등에 글을 올렸지만 감감무소식. 그동안 임보 할 수 있는 집이 생겼고 계속 입양처를 알아보다가 페이스북이 페이지까지 글을 올렸다고 한다.
처음 연락을 했을 때 녀석이 피부병을 앓고 있으니 치료가 된 다음에 입양을 하는 건 어떠냐고 했다. 인연이 되면 녀석이 우리 집에 오겠지 하며 편한 마음으로 그러라고 했다. 이후 몇 번 카톡이 오가다가 연락이 오지 않았다. 입양 사이트에서 보니 임시보호를 하다가 결국 정들어 키우는 경우가 왕왕 있단다. 그럴 때 입양하기로 했던 사람과 또 난처한 상황도 생기는 걸 봐서 그런가 보다. 하고 더 연락을 하며 보채지 않았다.
그리고 9월 말. 다시 카톡이 왔다. 혹시 입양을 하지 않았더라면 입양하실 수 있느냐고. 왜 그렇게 되었는지 자세한 사정은 묻지 않았다. 이틀만 말미를 달라고 했다. 이틀 후에 답을 드렸다.
"제가 입양하겠습니다."
이후에도 여러 번 곡절이 있었다. 아무래도 녀석의 피부병이 다 낫지 않은 것이 우선이었고 애초 데리고 오려던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인 한글날 당직인 줄 몰랐다가 당일 아침에야 당직인 줄 알고 부랴부랴 출근하며 양해를 구했다.
날짜를 따져보니 처음 입양 문의하고 나서 거의 두 달 만에 녀석은 우리 집으로 왔다. 막상 냥이가 집에 온다고 하니 아침부터 마음이 묘하게 설레었다. 데리러 가려했지만 아무래도 정들었던 냥이가 어떤 집에서 살게 될지 궁금해 하기에 데려다 달라고 했다. 덕분에 모처럼 오전 11시 교중미사를 드렸고 성당 다녀와서는 내내 집을 치우고 동네 반려동물 상점에 가서 필요한 것들을 사 왔다. 그때 어렴풋이 느꼈다. 부모들이 자식을 위해 돈을 쓸 때의 기분이란 게 이런 거와 비슷하겠구나. 좋아 보이는 건 샀다. 마트에 가서 간단한 정리용품들도 샀다. 냥이를 키우기에 뚜껑이 있는 것들이 좋다고 해서 여러 가지를 바꾸기 위해서다.
마침내 오후 7시 녀석을 데리고 임시보호를 하셨던 분들이 오셨다. 녀석이 쓰던 물품을 주고 키울 때 이것저것 주의사항을 알려주셨다. 집을 보더니 적이 안심을 하신 듯싶었다. 그리고 녀석이 우리 집에 오기까지 많은 분들이 애를 써주셨다고 담담히 알려주셨다.
생각해보니 계속 생각했던 이상형의 고양이가 우리 집에 왔다. 일단 작은 품종. 몸무게가 3킬로가 채 되지 않는단다. 그리고 성묘. 동물병원에서 검진했을 때 8세 정도 되었다고 한다. 또 누군가에게 버림을 받은 유기묘. 조용하고 사람 낯가리지 않고. 게다가 임보 하신 분들 말씀을 들어보니 고양이 특유의 털 빠짐도 확실히 덜하다고 한다. 자신들도 품종묘가 이래서 다른 건가 싶단다. 무엇보다 눈빛이 딱 이상형 고양이다. 검은 눈동자에 초록색 바탕. 눈동자가 고양이 특유의 타원형이기보다 ‘슈렉’에 나왔던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검은 눈동자가 동그란 녀석.
낯선 집에 온 지 겨우 세 시간 남짓 이후 어느새 안방 침대에 가서 자리를 잡고 누웠다. 머리를 쓰다듬어도 도망가거나 피하지 않는다. 아직 먼저 다가와 아는 척을 하지 않지만 고양이 치고는 붙임성이 좋은 녀석임에는 분명하다. 또 식탐도 거의 없어서 먹는 거 가지고 보채지 않는단다. 희한하게 마치 그냥 처음부터 키웠던 녀석인 양 나도 의외로 담담하고 자연스럽다.
녀석을 키우기로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생명에 대한 책임이 어떤 느낌인지 어떤 무게인지 고양이로나마 대리 체험해보고 싶어서였다. 사실 혼자 있다고 해서 외롭거나 심심해하지 않는 성격이라 많이 고민했다. '아직 백두대간이 나를 부르고 있는데 벌써 고양이를 키워야 하나. 히말라야 트레킹과 유럽 산티아고 순례길이 있는데 고양이를 키우면 어쩌나' 등등.
그런데 생명에 대한 책임. 이것을 늦어도 사십 대에는 감당해봐야 한다는 내면의 목소리가 더 컸다. 나 역시 부모님을 비롯해 누군가 나를 조금씩 책임져 주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무탈하게 살 수 있었다. 종교인으로 살 것이 아니라면 어떤 생명이든 키우고 책임을 져봐야 또 인간 삶의 깊은 무엇을 알 수 있을 터. 그것을 모르고 떠드는 내 이야기들 혹은 내 글들이 일정 부분 공허하거나 빈 곳이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녀석과의 삶이 어떠리라 지레짐작하지는 않으련다. 다만 비록 인간은 아닐지언정 같은 ‘동물’이란 종으로서 피가 흐르고 심장이 뛰고 감정이 있는 생명과 함께 한 공간을 공유하며 뭔가를 서로 의지하거나 혹은 정서적으로 소통하며 산다는 것. 그게 또 확대 해석하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그분이 바라시던 바일 것도 같다.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게 또 어떤 생명과 공존하는 방법을 녀석을 통해 배우고 익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