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 부모님께서 맞벌이를 하셨다.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무렵 동생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일을 나가셨다. 방학 때 어머니는 시간을 정해놓고 전화를 하셨다. 그 전화를 받아야 동네 친구들과 놀러 나갈 수 있었다. 아직 남아 있는 기억을 떠올려보면 어머니는 전화를 할 때마다 밥을 잘 먹고 있는지 동생이랑 싸우지 않고 잘 보살피고 있는지 등을 꼬치꼬치 물었다.
어린 마음에 그래도 책임감을 가지고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잘 하고 있다 생각했던 터라 어머니의 전화를 약간 볼멘 목소리로 받았다. 사실 어머니는 다정다감하게 말씀을 하시기보다 행여 염려하는 마음으로 잔소리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따로 돌봐주는 이 없이 어린 두 자식을 집에 놓고 생계를 꾸리기 위해 가게로 나가야 했던 어머니의 마음을 내가 알 리가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의 일이다.
어제 녀석이 우리 집에 온 이후 내 침대에서 녀석은 잠을 잤다. 고양이가 밤새 그루밍 하기도 하고 또 잠꼬대를 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다른 생명이 자는 침대에서 잠을 자본 게 딱히 익숙한 일은 아닌지라 오히려 잠을 설친 건 나였다. 평소보다 20여분 일찍 일어나 정신의 초점을 가급적 빨리 맞춘 후 출근 준비를 했다. 집에 나오기 전 사료와 물을 챙겨놓고 이동이 편하도록 방문과 거실 문을 열어놨다. 평소 닫아놓지 않았던 현관 앞 중문을 닫고 신발을 신은 뒤 현관문을 나서 문을 잠갔다. 그때까지도 녀석은 나를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마을버스를 타고 출근을 위해 지하철역에 가는 도중부터 녀석이 적이 걱정스러웠다. 어쨌든 익숙하지 않은 집에 홀로 남아 종일 있어야 할 녀석의 심정을 내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어도 염려는 인간의 몫이기에 약간의 조바심도 났다. 혹시나 몰라 라디오 볼륨을 낮게 하고 탁자 위 스탠드 하나를 켜놓았지만 불안했다. 인기척 없는 집에서 과연 녀석은 내내 불안해하거나 혹은 어디 책장에 올라 물건이라도 떨어뜨렸다가 다치지는 아니할까. 걱정이 됐다.
일을 하면서 내내 녀석을 생각하진 않았다. 어떤 생명이 집에 들어오건 말건 나의 일상은 그와 무관하게 반복되었다. 다만 틈틈이 고양이 관련 사이트를 뒤적거렸고 어젯밤에 찍었던 녀석의 사진을 휴대폰에서 틈틈이 꺼내봤다. 눈에 밟힌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실제 물리적으로 무엇에 밟혀 혹은 밟아 행여 다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과 걱정이 뒤섞이는 과정.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별일 없겠지 스스로 다독였다.
내가 챙겨주지 않으면, 내가 보호하지 않으면, 내가 책임지지 않으면 그 생명을 온전히 일상에서 유지할 수 없는 존재. 부모가 어린아이를 보는 마음의 기저에 있는 나 외의 존재에 대한 본능적인 인식일 것이다. 처자식을 위해, 자식을 위해, 남편을 위해, 식구를 위해 등등 출퇴근길에 마주치는 수천 명의 무표정 뒤에 숨어 있는 우리들의 고됨은 나 외의 그리 연약한 존재들이 있기에 의미가 있고 버티어 나갈 수 있다.
시절은 흘렀지만 아마도 어머니가 내 나이 때 어린 자식 둘을 놔두고 출근하는 길에 느꼈던 심정이 어떤 감정이었는지 마흔 넘어 이제야 겨우, 아주 미세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었다. 막연히 느낀 것이 아니라 실제 존재하는 생명 덕에 감정의 결은 미세했어도 그 감정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런 육중한 무엇이 덜컥 내 자유로움에 매달려 전처럼 내 위주로만 행동할 수 없다 생각하니 갑작스레 시간이 푹 젖는 듯했다. 이것을 일상의 수렁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성장한 것은 또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그 일상의 수렁에 기꺼이 빠져 들어가 자신의 뭔가를 희생한 덕분일 것이다.
집에 돌아오니 녀석은 살짝 외면했다가 다시 다가와 이리저리 킁킁 거리더니 자기 할 일을 했다. 이틀밖에 안 되었음에도 마치 이 집에 살았던 냥 천연덕스럽게 돌아다녔다. 몇 번 쓰다듬어 주고 놀아주었지만 녀석은 시큰둥. 해서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펼치자 그제야 곁으로 와서 한 번 쓰윽 쳐다보고 또 방으로 들어갔다.
30여 년 전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어린 자식 둘이 남아 있는 집으로 하루의 고된 장사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동생과 나는 아마도 어머니와 아버지를 보면서 꾸벅 인사를 하고는 또 동네 친구들과 놀이에 각자 가지고 놀던 장난감에 혹은 뭔가 할 일에 열중했을 것이다. 부모님은 무탈하게 하루를 보낸 자식들을 보고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운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나와 동생은 괜히 꿋꿋한 모습 보여드리겠다며 일부러 무심한 척 자기 할 일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아련했던 모습이 녀석의 눈동자를 보았을 때 문득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