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독신 공감

독신으로 산다는 것 61
-또 다른 세상의 단면

고양이 동거기

by 월영

냥이가 집에 온 지 일주일하고 하루가 지났다. 낯선 생명체와 동거를 시작하기 전 적지 않게 걱정하고 염려했지만 예상보다 무탈하게 녀석이나 나나 한 공간에서의 공존에 익숙해지고 있다.


먼저 냥이가 새집에 적응을 못해 구석에 숨어있거나 음식을 잘 먹지 않거나 배변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왕왕 있다고 하나 녀석은 다행히 이 점에서는 모두 예외적 존재다. 오자마자 여기저기 기웃거리기 시작하더니 구석은커녕 안방 침대부터 점령했고 버리려고 마음먹었던 의자 밑을 자신의 주 거주지로 점찍었다. 캣타워는 거들떠보지 않고 서가 구석 한 칸을 비워 만들어 놓은 공간에도 들어가 있지 않는다. 음식 또한 기존에 먹던 사료를 꼬박꼬박 잘 챙겨 먹고 있고 물도 하루에 0.4리터에서 0.5리터 정도는 마시고 있다. 배변도 규칙적이고 이상이 없다.


그래도 여전히 낯선 게 더 많다. 우선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할 알람 소리가 울릴 무렵이면 먼저 야옹거리며 침대 위에 올라와 얼굴을 비비적거린다. 이제는 아예 배위로 올라와 거기서 그루밍을 한다.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가 깨워주지 않아도 일어났던 데다가 타인의 손에 의해 아침에 눈 떠 본적이 군 시절 외에는 딱히 없던 지라 ‘이게 뭐지’ 스스로 혼란이 온다.


또 녀석은 계속 내 주위에서 맴돌며 혼자 놀거나 누워있거나 혹은 어디선가 나를 쳐다본다. 그 시선이 순진무구하여 종종 일을 하다가 쓰다듬어 주다 보면 또 시간이 훌쩍 간다. 그 과정에서 사람 손길에 적이 만족스러워하며 꾸벅꾸벅 눈을 감는 모습은 여러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생명체 특유의 숨소리와 진동과 촉감과 그에 따른 교감은 이제껏 잘 몰랐던 세상이었다.


어쩌면 언어를 배우기 이전에 먼저 배웠던 다른 생명과의 소통방식. 그에 따른 인간의 ‘동물적 속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었다. 종족 간의 본능적인 쾌락이나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접촉이 아닌 그저 존재와 존재간의 지금 우리 여기 함께 상호 비폭력적으로 살아있다는 느낌의 일면을 환기할 수 있는 계기는 어떤 이에게는 일상이었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매우 비일상적인 경험이다. 아니 잊고 있던, 잊으려 했던 기억이다.


그리고 벌써부터 녀석 때문에 생기는 미래에 대한 걱정도 생경한 대목이다. 생명은 저마다의 생애주기가 있고 녀석과 나 또한 종이 다른 만큼 생애주기 또한 개별적이다. 아직 깊고 깊게 정들지는 아니했지만 녀석이 먼저 떠나는 세상을 무심결에 떠올려보기도 한다. 사실 녀석과 함께 산 일주일 남짓보다 녀석 없이 산 수천일, 수만 일이 나에겐 더 익숙하다. 그런데 벌써부터 녀석이 없는 일상은 또 어떨까? 싶다. 이 지점에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의 심정을 보다 헤아릴 수 있게 됐다.


숱한 이해타산으로 복잡다단한 관계들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관계. 얼굴과 얼굴을 맞보며 그저 표정으로 상호 비폭력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존재의 상실. 그에 따른 정서적 타격과 감정의 우울함에 대해 나는 크게 공감한 적이 없었다. 이제는 그런 무신경함이 내 앞으로 일상에서 버티고 있지 못할 듯싶다. 그게 냥이를 키우면서 얻는 또 다른 타인에 대한 이해일 것이다.


냥이가 오고 난 뒤 여전히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시달리고 회사일로 스트레스를 받고 시간은 빈틈없이 정확하게 반복되는 하루들이 지나가고 있다. 실은 그 안에서 또 이렇게 이전에 겪지 않았던 혹은 몰랐던 감정의 결들을 하나씩 펼쳐보며 이전과 다른 하루들도 함께 흘러가고 있다. 옆에서 내가 잠들기 전까지 잠들지 않는 생명 하나가 주는 ‘또 다른 세상’의 단면들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