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사적인 영화 '라라 랜드' 리뷰
영화는 둘 사이에 공통분모였다. 영화 관람은 둘의 데이트에서 우선순위였다. 남자는 여자가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눈빛의 콘트라스가 강해진다는 걸 종종 느꼈다. 가령 스파이더맨을 보고 나온 뒤 여자가 '스파이더맨'의 수직 낙하 장면 카메라 워크를 설명할 때 남자는 속으로 꽤나 감탄했다. 날이 춥다고 움추러들었던 여자의 목소리에 어느새 열정이 묻어 나와 영화의 장면에 취하는 모습이 그렇게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허나 둘은 극장에서 다정하게 어깨를 기대어 영화를 봤어도 관람 후에는 약간 과열한 상황에 이르기까지 종종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둘이 이견이 갈렸던 영화 중 한 편이 바로 데미언 체즐 감독의 '위플래시'였다. 남자는 영화 속 과도한 완벽주의가 불편하다고 했다. 여자는 영화 자체의 완성도가 높다며 완벽함을 위해 헌신하는 인물에 매력을 느낀다고 했다. 괜히 서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사실 그 부분은 남자와 여자가 다른 지점이었다. 남자는 성정이 꼼꼼하지 못했고 완급의 조절을 이유로 대충대충 넘기는 성향이 있었다. 여자는 꼼꼼하고 완벽한 것을 좋아했다. 또 그래야만 자신의 작업 현장에서 버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위플래시'에 대한 다른 반응은 결국 그간 서로에게 서운했던 것에 대한 감정적인 싸움으로 이어졌다. '위플래시'를 보고 얼마 후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한 상황에 처했다.
'라라 랜드'는 데미언 체즐 감독이 '위플래시'의 성공 덕에 만들 수 있던 영화였다. '위플래시'를 만들기 전인 2005~6년 무렵 각본을 썼지만 데미언 체즐 감독은 당시까지만 해도 무명 감독이었다. '위플래시'에 비해 제작 규모가 컸던 '라라 랜드'는 일단 묻어두고 '위플래시'부터 만들었다. 재즈 드러머가 주인공이었던 '위플래시'는 재즈에 대한 감독의 애정이 흠뻑 묻어 있는 작품이었고 다소 극단적인 인물을 앞세워 드라마틱한 연출로 성공했다. 이를 바탕으로 할리우드의 스타 배우인 라이언 고슬링과 엠마 스톤을 캐스팅해 '위플래시' 보다 먼저 구상했던 '라라 랜드'를 찍을 수 있었다.
'라라 랜드' 역시 '위플래시'처럼 재즈가 기반인 영화다. 남자 주인공인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이 바로 재즈 피아니스트. 세바스찬은 백인임에도 재즈에 대한 매력을 놓지 못해 고생을 자처한다. 여자 주인공 미아(엠마 스톤)는 단역 배우. 둘은 아직 각자의 분야에서 성공하기 전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게 영화의 줄거리다.
남자는 '라라 랜드'를 보면서 처음부터 둘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세바스찬은 재즈 피아니스트. 재즈는 악보보다 연주자 개인의 기량으로 당일 그 현장의 분위기를 녹여내는 즉흥적이고 임의적인 음악. 오직 자신의 감정이 업의 본령을 이룬다. 반면 미아는 배우. 자신의 감정이 아닌 타인의 감정에 개입해 그것을 표출해야 하는 직업. 나의 감정에 충실해야 하는 직업과 남의 감정에 충실해야 하는 직업의 남녀는 결국 해피엔딩을 맞지 못한다. 물론 이러한 분석은 비약에 따른 비논리적인 분석이지만 직감적으로 그랬다. 둘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남자는 세바스찬과 미아의 사랑에 감정이입이 다소 쉽지 않았다. 영화를 영화적인 상황으로만 보지 않고 현실에 대입시켜 스토리의 현실성을 살피는 것 남자의 영화 평가 기준이다 보니 그랬다. 특히 예술이란 영역에서 이를 타고나지 못한 평범한 남성으로서 은근한 자격지심 같은 것이 있는지라 더 했을 것이다. 연애란 것도 저러한 예술적 재능이 있는 이들에게나 가능한 것이란 말인가 싶은 우스운 자격지심.
'라라 랜드'를 비롯해 감독의 전작이었던 '위플래시'를 관통하는 것은 예술(정확히는 음악 혹은 재즈)에 대한 찬양이다. '위플래시'가 예술의 완결성을 위한 인간의 다소 극단적인 충돌을 그렸다면 '라라 랜드'는 예술의 길을 걷는 이들을 위한 연가라고나 할까. 그 면면에는 예술을 향유하는 관객보다 그것을 창조하고 살아가는 예술가들에 대한 감독의 애정과 확신과 은근한 우월감이 스며있었다. 유미주의적인 관점에선 탁월했고 예술이 인간 자체를 넘어서려는 것에 대해 삐딱한 남자의 입장에선 불편한 구석이 있었다. 물론 이런 불편의 심리 기저에는 시기심 같은 게 있겠지만.
사실 남자가 홀로 '라라 랜드'를 보고 나오면서 떠올린 것은 이제는 헤어져 소식을 듣지 못하는 여자에 대한 상념이었다. 아마도 여자 역시 이 영화를 보았을 것이고 남자를 떠올렸을 거라 홀로 짐작했다. 가로등이 켜진 공원에서 춤을 추진 않았어도 손을 잡고 걸었고 별들이 떠다니는 하늘 위에는 없었어도 구름 속을 걷는 듯한 미술관의 설치작품 속에 단 둘이 있어봤다. 그런 추억을 여자는 떠올리지 않았을지라도 남자는 떠올렸고 못내 추운 겨울밤 버스 몇 정거장을 걸으며 헛헛해했다.
결국 '라라 랜드' 역시 미아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세바스찬의 눈빛과 이어지는 피아노 연주로 마무리한 작품.
남자는 '라라 랜드'의 간판이 극장에서 내려올 즈음에서야 영화의 몇 장면들을 되새기며 글을 적었다. 남자와 여자의 연애가 세바스찬과 미아와의 영화 속 사랑과는 달랐겠지만. 그래도 닮아있던 순간들이 꽤나 많았다고. 그래서 고맙고 고마우며 한때 마냥 기다리기도 했다고. 언젠가 우연히 이 글을 읽을지도 모르는 여자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