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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신 공감

독신으로 산다는 것-72
'행복 회로'를 돌린 날

by 월영

1.

토요일 아침. 날씨가 쌀쌀했다. 오늘 아니면 언제 또 치우나 싶어 집 문을 죄다 열어놓고 오전 아홉 시부터 청소를 했다. 특히 오래간만에 작심하고 베란다를 치웠다. 고양이 두 마리가 뒹구는 공간인 데다가 녀석들의 화장실도 베란다에 있어 지저분했다. 고양이들을 거실에다 몰아넣고 베란다와 거실 창 사이 문을 닫은 채 락스로 물청소를 하다 보니 반나절이 금세 흘렀다. 청소를 마친 뒤 고양이들을 베란다에 풀어 넣었더니 두 녀석은 캣타워 내 구멍에 들어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 없는 사이에 두 녀석이 정이 들었는가 싶어 기특하기도 했고 희한하게 서운하기도 했다.


30265386_1757796114243087_7988884438962405376_n.jpg 동네 아파트 단지에 활짝 핀 벚꽃 아래 아이들


점심을 먹고 날이 개기 시작했다. 바람은 찼지만 화창한 공기가 반가워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인근 근린공원에서 천주교 묘지 뒤편 봉우리를 찍고 아파트 단지 벚꽃을 본 뒤 발바닥공원으로 2시간 30분 남짓 산책 겸 트래킹을 했다. 특히 도봉산 능선에는 진달래가 한창 펴 있었다. 먼데 가지 말고 가까운 데라도 자주 다녀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했다. 지척에 국립공원을 두고 사는 주민으로서 주어진 환경을 최대한 누리는 것이 또 이 동네 사는 이득일 테니까. 그리고 공원 산책과 약간의 등산을 더한 코스를 ‘쌍티아고 동네길’이라 명명했다.


2.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고 부모님 댁에 갔다. 나이 들수록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는 게 실은 가장 큰 효도는 아닐까 싶다. 멀지 않은 곳에 사시니 하룻밤 자고 오진 않더라도 주말에라도 가서 저녁이나마 먹고 오는 일. 그게 실은 효도가 아니라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부모님 앞에서 나는 어떤 누구가 아니라 그저 아직 내리사랑을 받는 자식으로 돌아와도 흉이 아니다.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저녁을 먹다가 어머니에게 머리 또 염색했냐고 물었더니 색 잘 나왔냐고 물으시며 염색하신 이야기를 10여분 넘게 하셨다. 아버지와는 왔냐? 가냐? 정도밖에 대화를 아니했지만 두 분 건강히 계신다는 사실만으로도 적잖이 마음도 놓이고 또 놓였다. 집에 돌아와 잘 도착했다고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께서는 피곤할 테니 빨리 자라며 서둘러 전화를 끊으셨다. 그 짧은 통화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이들이 점점 주변에 많아지고 있다. 봄바람에 오히려 서글픈 이들에게 평화 있기를.


3.

오늘은 5월 초에 떠날 휴가 계획을 종일 궁리하고 틈틈이 고양이 녀석 수발하느라 하루가 다 갔다. 애초에는 고양이 녀석 관련한 글을 쓰고자 마음먹었지만 도봉구의 쌍티아고 동네길을 걷다가 정말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와야겠다는 다짐이 굳어지면서 모두 허사가 되었다. 항공권 검색을 비롯해 일정을 짜다 보니 하루가 흘렀다. 그 와중에 눈이 내렸고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렸으며 빨래를 하고 옷가지를 정리했다. 고양이 두 녀석의 이런저런 모습을 스마트폰에 담으며 홀로 큭큭거리기도 했다.

30124661_1757621800927185_7778006917732892672_n.jpg 페르시안친칠라인 송이(왼쪽)와 어쩌다 임보해온 고양이 금순이. 순한 녀석들이라 서로 경계하지 않고 아직까지는 잘 어울리고 있다.


4.

이렇게 주말을 보낸다. 온전히 휴식을 취했고 이런저런 일상의 살림을 했으며 부모님을 뵈었고 동네 산책과 고양이 두 녀석을 쓰다듬어 주었으며 맥주 3캔을 마셨고 인터넷을 통해 벌써 산티아고 순례길의 절반은 둘러보았다. 마음먹었던 글은 쓰지 못했고 운동 역시 하지 않았으며 한 켠으로 어영부영 시간만 허비한 게 아닌가 싶은 후회가 들지만 한 일이 많은 거 같고 또 한 일이 없는 거 같은 주말의 심심함과 단순함 또한 누군가는 간절히 바라는 주말의 시간임을 생각하면, 그리고 또 그 누군가 중에 한 때의 나 또한 포함되었음을 상기하면 그저 또 자기 전에 드는 감정은 고마움과 충만이다.


이를 요즘 시쳇말로 ‘행복 회로’라고 하더라. 그 회로도를 설계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역시 홀로 있을 때의 담담함이다. 그 담담함이 오늘 하루 덕에 조금 더 깊어졌다면 애초에 주말에 하려 했던 무엇들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괜히 후회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차피 시간은 지나갔고 또 주말은 다시 돌아올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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