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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영 Jun 12. 2018

홀로 여행을 떠날 때 바라는 건

산티아고 순례길 미완의 완주기 2

남자와 여자가 길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가 ‘소울메이트’임을 알아보고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미혼남녀 혹은 일부 기혼자들일지라도 혼자 여행을 떠날 때 내심 바라는 소원이다. 그런 이유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은 여행자들 사이에서 소울메이트를 찾기 위한 최적의 코스로 꼽히기도 한다. 다른 여행지보다 혼자 오는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 많아서다. 커플로 오거나 친구끼리 아니면 부부나 부녀, 모녀, 부자, 형제, 자매끼리 오는 경우도 있지만 막상 길에서 보는 순례자의 대략 절반 이상은 동반자 없이 홀로 그 길을 걷는다.  


이유가 있다. 우선 같이 걷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람이 멀리 유럽까지 가서 마냥 걷기만 하는 여정을 좋아할 확률이 높지 않다. 게다가 설령 같이 걸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람과 일정을 맞추기도 쉽지 않다. 순례길이란 여정 자체를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자성과 성찰의 시간으로 삼고자 한다면 오히려 누군가와의 동행이 불편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 길을 걷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의 내면에는 ‘혼자서 그 길을 걸었다’는 자부심을 얻고 싶은 욕망이 은연중에 자리 잡고 있다.


사실 숱한 여행지 중에 굳이 그 길을 가는 사람들 자체가 평균 분포에 있는 이들은 아닐 것이다. 인공지능이 출현하고 인간이 마치 우주라도 정복할 것처럼 기고만장한 이 시대에 종교적인 믿음을 위해 그 길을 걷는 이들 자체가 일단 소수다. 종교적인 이유로 걷는 본래 의미의 순례자 외에 주로 인생에서 자신의 영혼이든 남과의 관계에서든 허기를 느낀 이들이 그 길에 끌린다. 의외로 자본주의와 대중문화의 허상에 매몰되어 허기를 모르거나 외면하며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보니 허기를 느낀 이들도 다수에 속하지 않는다.


수동적인 관광보다는 능동적인 여행을 선호하고 낯선 곳에 있는 상황에서 무언가라도 의미를 찾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도 산티아고 순례길은 자장을 미친다. 이들은 흔히 말하는 일상의 평범한 연애에 안주할 가능성이 낮다. 아니 평범한 연애조차 못 해본, 안 해본 사람일 수도 있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영혼의 동반자를 기다리며 싱글로 살아가는 게 익숙한 이들의 내면에는 그만큼 내 영혼의 동반자를 만나고 싶은 바람도 크다. 짝을 만나겠다고 주변에 대놓고 말하기에는 살짝 자존심이 상하는 이들. ‘순례길’로도 포장할 수 있는 산티아고의 여정은 자신의 은밀한 소원을 드러내지 않고도 탐색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설사 평범한 연애건 불같은 연애건 오랜 결혼생활이건 동거건 간에 커플이란 관계에 있다가 자의나 타의에 의해 그 관계에서 이탈해 부지불식간에 혼자가 된 이들 또한 산티아고 순례길 지도를 보면서 한결 홀가분해진 자신의 처지를 그 길에 쉽게 대입한다. 미련이나 애착이나 후회 등 자신을 휘몰아쳤던 감정들이 그 길에선 완전히 사멸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긴다. 나아가 지난 인연, 관계보다 더 나를 충만하게 하는 관계를 그 길에서 맺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샘솟는다.    


이런 등등의 이유로 혼자 걷는 사람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의 다수다. 세상에선 비주류였지만 그 길에서는 주류다. 동질감을 느낀 이들은 쉽게 마음을 열고 실제로 그 길에서 만나는 많은 이들은 친구에게, 가족에게, 동료들에게 섣불리 말하지 못한 고민들을 털어놓기도 한다. 그것이 같은 말을 쓰는 같은 국적의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니면 만국 공통어가 된 영어가 통하는 사람들끼리 일수도 있다. 그 상황은 다분히 특별한 느낌을 주기에 알맞다. 생판 모르던 사람들끼리 각자의 일상에서 벗어나 고생을 담보로 하는 그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만나 서로의 내면에 담겨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하고 위로를 받는다. 그렇게 밀도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가 또 자연스럽게 헤어지고 전혀 예기치 않은 순간에 다시 만난다. 운명적인 인연. 영혼의 동반자를 만나기에 그 정도의 극적인 상황은 만들어져야 스스로 수긍할 수 있다.  


싱글에 미혼인 처지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준비할 때 ‘운명적인 상대’에 대한 로망이 없지 않았다. ‘한국에서 만나 한국말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인연을 만나지 못했는데 거기에서 만나기를 기대하는 건 과대망상이다’라고 주변 지인들에게 무관심한 척 말했지만 ‘만에 하나 그런 인연을 만날 수 있을까?’라는 기대가 전혀 없다고 말한다면 양심을 속이는 행위일 것이다.  


이러한 기대감이 근거 없는 과대망상은 아니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준비하며 읽었던 여행기를 비롯해 인터넷 등에서 찾아본 산티아고 순례길 후기에는 실제로 순례길을 걷다가 만난 ‘소울 메이트’에 대한 사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어에 대한 자신감은 하나도 없었고 실제로도 실력이 미천했기에 국적과 인종을 초월한 인연을 만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혹시나 그 길을 걷는 같은 국적의 누군가와 작은 로맨스라도, 하다못해 이른바 ‘썸’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기대를 했다.

하지만 나의 일정은 순례길을 대부분의 한국 순례자들처럼 온전히 다 걷는 일정이 아니었다. 일정상 중간에 버스를 타고 순례길 코스를 건너뛰어야 했다. 생장피에드포트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걸어서 완주하는 순례객들끼리 형성되는 무언의 카르텔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순례길 중 대부분의 로맨스는 같은 일정으로 걷는 이들 사이에서 주로 생겨났다. 나처럼 걷다가 버스 타고 걷는 어찌 보면 ‘절반의 순례객’에게는 길에서 고락을 같이 하며 형성할 수 있는 서로 간의 호감은 가질 수 없는 무엇이었다. 만약 나와 같은 일정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한국인 처자가 있었더라면 또 모를 일이었겠지만 순례길에서 만난 수십 명의 한국인 순례자들 중에 나는 중간에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예외적인 사람일 뿐이었다.  


사리아에서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 걷는 동안 길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 약속하지 않았음에도 알베르게의 같은 방에서 묵으며 술을 마셨고 산티아고 시내에서도 우연히 만나 서로 신기해했던 한국인은 싱글이긴 했지만 전역한 지 4개월 되었다는 청년이었다. 팜플로나 지나 묵었던 수비아 알베르게의 마당 그늘 아래서 맥주를 마시며 편하게 대화를 나눴던 한국인 여성분들은 신랑에게 살림을 맡기고 오신 결혼 20년 차가 넘는 커리어 우먼들이셨다. 산티아고의 사립 알베르게에서 늦은 밤 헝가리 청년이 자신의 휴대폰으로 틀어준 엔리오 모리꼬네의 시네마 천국 OST를 함께 들었던 일본인 처자와는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눴지만 서로에 대해 묻진 않았다.    


되돌아보면 기회가 될 만남들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회 이전에 깨달음이 먼저였다. 생장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으며 보름 남짓 짧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바라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정확하게는 운명적인 인연을 바라는 마음이 커지면 그 길이 선사하는 다른 무엇들을 놓아 둘 공간이 줄어든다는 것을 인지했다. 운이 좋아 그 길에서 ‘소울메이트’를 만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 길이 주는 부가적인 무엇일 뿐 그 길이 선사하는 가장 중요한 선물은 다른 인연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평소에도 스스로를 잘 아는 편이라고 자부하는 편이었지만 나 스스로 내 자신을 대우해주고 아껴주었는가를 생각해보면 딱히 그렇지 않았다. 내 몸이 휴식을 바라도 일을 핑계로 몸을 혹사시키는 것은 예사였다. 불필요하게 많이 먹고 취했고 불규칙하게 생활하며 내 몸의 항상성을 깨뜨렸다. 나이를 먹고 늙어가는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고 저 멀리 이십 대의 허상이 아직도 나 인양 여기며 철없이 굴었다. 주변의 지인들이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은 외면하고 나 혼자 어른인양 으쓱거렸다. 시쳇말로 꼰대처럼 행동하면서도 젊은 사람들에게는 말이 통하는 선배처럼 보인다고 속으로 자신했다.


길을 걸으며 타인의 마음속으로 깊게 들어가 보진 못했지만 대신 나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고 나의 현재를 받아들이고 여전히 모순 투성이고 일정 부분 위선적이며 위악적인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시간 안으로 들어갔다. 남에게 보여주기 좋아하고 또 그만큼 감추는 것이 많으며 남에게 인정받길 바라면서 남들의 시선은 무시하는 이중적인 무엇들이 혼합되어 있는 내가 그 길에서 만난 진정한 동반자였다. 그 동반자와 이야기하는 순간들이 즐겁기만 하진 않았어도 지루하지 않았고 모처럼 내가 세상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자각에 슬며시 웃음이 나는 순간들도 종종 있었다. 그 자각의 끝은 종교적인 감동의 시작이기도 했다.

만약 그 길에서 내심 바랐던 ‘소울메이트’를 만났더라면 그 길은 운명의 누군가를 만났던 길로도 남겠지만 반대로 훗날 애써 잊고 싶은 추억의 길로도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 내 평생에 산티아고 순례길이 애써 잊고 싶은 추억의 길로 남을 우려는 사라진 셈이다.    


길을 걷다 보면 눈에 보였다. 서로 가까운 듯하면서도 무언가 조심스러운 그 분위기. 서로가 운명일까 아닐까 갈팡질팡 하지만 서로의 끌림에 기꺼이 자신을 열고 보조를 맞춰 걷는 이들. 그들은 길에서 만난 커플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비록 내게는 그러한 동행이 생기는 운이 끝내 없었지만 그렇다고 서럽거나 아쉽지도 않았다. 타인의 기쁨을 딱히 질시하거나 부러워하지 않을 만큼. 그 길을 걷는다는 것 자체와 그 길에 펼쳐진 날씨와 풍경과 마주치는 사람들만으로도 능히 행복하다고 느낄 만큼. 나도 모르게 마음이 단단해지고 말랑해지고를 반복하며 담담해졌기 때문이다. 오롯이 나를 만나고 나와 이야기하는 시간이 깊고 길어서다. 덕분에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왔을 때 그 길의 여운을 차분히 되새기며 음미하는 시간을 만날 수 있었다. 일생에서 만나야 하는 게 꼭 인연만은 아니라는 새삼스러운 자각도 곁들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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