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월영 Jun 26. 2018

그 길을 동경하면서 또 의심했다.

산티아고 순례길 미완의 완주기 4

스페인어로 ‘산티아고’는 산토(Santo, 성聖)와 이아고(Iago, 야고보)의 합성어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인인 야고보(?~44) 사도를 뜻한다. 가톨릭 미술에서 야고보 사도는 호리병을 건 지팡이를 쥐고 맨발로 걷는 순례자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순례자의 수호성인인 야고보 사도의 또 다른 상징은 조개껍데기이다. 언어권에 따라 영어권에서는 제임스(James), 불어권에서는 자크(Jacques), 러시아어권에서는 야코프(Yakov)라 표기하고 불린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기본적으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이하 산티아고)라는 가톨릭 성지로 가는 길을 뜻한다. 스페인 갈라시아 지방의 도시인 산티아고는 교황 알렉산더 3세 시대인 12세기 후반 로마 가톨릭의 주요 도시로 부상한다. 알렉산더 3세 교황이 1189년 예수의 열두 사도 중 한 명인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안치되었다는 이유로 산티아고를 로마와 예루살렘에 이어 성지로 선포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3세 교황은 산티아고를 성지로 선포하면서 ‘성스러운 해’(야고보 사도의 축일인 7월 25일이 일요일이 되는 해)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는 순례자는 그동안 지은 죄를 완전히 속죄받고 다른 해에 도착한 순례자는 지은 죄의 절반을 속죄받는다는 칙령도 발표했다. 이후 유럽 대륙의 가톨릭 신자들이 이슬람이 점령하고 있던 예루살렘 대신 이베리아 반도 북부 지역의 마을과 도시를 이어주는 길을 따라 죄의 사함을 얻기 위해 산티아고까지 가면서 산티아고 순례길의 원형이 만들어졌다.


신약성서에 따르면 어부 제베대오의 아들인 야고보 성인은 동생인 사도 요한과 함께 아버지를 도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살다가 예수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지 않겠냐는 말씀을 듣고 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나선다. 특히 야고보 사도는 복음서에서 베드로 및 요한과 함께 예수가 타볼 산에서 ‘영광스러운 변모’를 할 때 지켜본 제자로 기록될 만큼 예수에게 총애를 받던 사도 중 한 명이었다.

야고보 사도는 예수 부활 후 성령을 받아 다른 사도들처럼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서쪽으로 선교를 떠났다. 야고보 사도는 배를 타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대서양과 만나는 갈라시아 지역의 파드론과 피니스테레로 추정하는 곳까지 와서 포교를 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야고보 사도의 행적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즉 이베리아 반도에 기독교를 전파한 사람이 바로 야고보 사도였다. 야고보 사도는 기원 후 44년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유대인의 왕이었던 헤로데스 아그리파 1세의 명령으로 7월 25일 파스카 축일 전날 순교했다. 열정적인 성격으로 ‘천둥의 아들’로 불렸던 야고보 사도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첫 번째 순교하는 제자가 된다.  


야고보 사도의 순교는 신약성서가 기록하고 있지만 이후의 궤적은 이베리아 반도 내 전승으로 이어져 왔다. 전승에 의하면 야고보 사도가 순교 한 뒤 몇 명의 제자들이 야고보의 시신을 돌로 만든 널에 안치해 해변으로 옮기자 천사가 돌로 만든 배와 함께 나타나 야고보의 시신을 실었다. 선원과 노, 돛도 없던 배는 지중해와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 대서양 연안을 따라 로마 시대 갈라시아 지방의 수도로 현재 파드론 지역의 이리아 플라비아에 닿았다. 야고보의 시신은 조개껍데기들에 쌓여 손상되지 않았고 야고보의 제자들은 계시를 받고 스승의 시신을 수습한 뒤 당시 사람들이 세계의 끝이라 믿었던 피네스 테레에 묻는다.


그때 갈라시아 지역의 이교도의 왕이었던 루파 여왕은 로마인들과 도모해 성 야고보의 시신과 그의 제자들을 없애려 했다. 전승에 따르면 야고보 사도의 제자들은 루파 여왕의 군대를 피해 탐브레 강 위에 난 다리를 건너 도망을 갔고 제자들이 다리를 건너자마자 다리가 무너져 뒤쫓던 루파 여왕의 군대는 그 자리에서 돌아서야 했다.


4세기부터 5세기 무렵 그리스어로 쓰인 신약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고 구약성서를 히브리어 원문에서 라틴어로 번역하는 데 뛰어난 업적을 남긴 성 예로니모(347~419)가 예수의 12 사도에 대해 자신들이 복음을 전파한 지방에서 안식을 취해야 한다는 입장을 남겼다. 예로니모의 가르침으로 야고보 사도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했지만 이베리아 반도에 묻혔다는 전승은 보다 권위를 지니게 되었지만 야고보의 무덤은 오리무중이었다.


이후 이슬람이 이베리아 반도로 진출해 가톨릭을 탄압했던 9세기 초반. 펠라요라는 이름의 수도사가 큰 별빛에 이끌려 갈라시아의 리브레돈 들판으로 온다. 펠라요 수사는 별빛이 숲 속 한 동굴을 비추는 것을 보았고 그곳에서 무덤을 발견했다.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밤길을 걷던 주민들이 밤하늘을 보다가 별빛들이 구릉지의 들판을 맴돌면서 춤을 추는 것을 목격하였고 그곳을 조사하다 구전되어오던 야고보의 무덤을 발견했다. 당시 그 지역을 관할하던 테오도리루스 주교는 과거 전승과 예로니모의 가르침을 근거로 그 무덤을 야고보 사도의 무덤이라고 공포한다.


그 후 야고보 사도의 시신을 현재 산티아고로 이장하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는 지명이 생긴다. 콤포스텔라는 스페인어로 별들의 들판이라는 뜻으로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된 것에서 유래했다. 이런 사실은 서유럽 일대로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예수의 성배와 성의 등을 찾기 위한 여정이 중세  유럽 대륙 전역에 숱한 전설을 남겼던 것을 고려하면 야고보 무덤의 발견은 당대 가장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이후 에스파냐의 국왕 알폰소는 그 묘지 위에 150년에 걸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을 건축했다. 여기에는 정치적인 배경도 한몫했다.


지중해와 접한 아프리카 북부 지역을 점령 한 뒤 이베리아 반도로 진출한 이슬람은 로마시대 이후 이베리아 반도에 있던 가톨릭 왕국들을 무너뜨린다. 이런 상황에서 이베리아 반도 북부의 가톨릭 왕국들은 ‘재정복’이라는 뜻을 지닌 ‘레꽁끼스따’(Reconquista)의 기치를 내걸고 이슬람교를 믿는 무어인들과 전쟁을 치른다. 718년부터 1492년까지 약 7세기 동안 이어진 레꽁끼스따 시기에 야고보 성인의 무덤 발견은 이베리아 반도 내 가톨릭 신자들에게 종교적 사명감을 고양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덕분에 야고보 사도에 대한 전설이 스페인 곳곳에 내려온다. 대표적인 것은 산티아고 순례길에 있는 바스크 지방 로그로뇨 지역에 내려오는 전설이다. 야고보 성인은 로그로뇨 근처 ‘끌라비호 전투’에서 백마 탄 전사의 모습으로 나타나 이슬람 군대를 향해 칼을 휘두르며 전투에 앞장서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슬람 군대와 싸우던 기사가 바닷물에 빠졌는데 야고보 사도의 도움으로 살아났다는 전설도 있다. 바닷물에 빠진 기사가 누군가의 도움으로 물 위로 떠올라 목숨을 구했는데 그 기사의 몸이 야고보 사도의 상징인 조개껍데기로 싸여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레꽁끼스따 시기 중 이베리아 반도의 수호성인으로 격상한 야고보 사도였기에 그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는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왕들과 로마 교황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대성당을 지은 뒤 신자들의 순례를 장려해 야고보 사도가 이슬람 세력과 맞서는 구심점이 되길 바랐다. 특히 예루살렘 성지 순례가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 제국의 확장으로 어려워지면서 로마 가톨릭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대체 성지로 육성했다. 서유럽 대륙의 가톨릭 신자들은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발걸음을 돌려 피레네 산맥을 넘고 광활한 스페인 북부의 평원을 가로질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순례를 떠났다.  


순례길에 대한 최초의 문헌상 기록은 1109년 갈리스토 2세 교황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 여행에 동행했던 에메릭 피코(Aymeric Picaud)가 쓴 ‘칼릭스티누스 고사본(Codex Calixtinus)’ 제5권을 꼽고 있다.  최초의 산티아고 순례길 안내서로 평가받는 고사본에는 순례길 묘사를 비롯해 순례길 도중에 발견할 수 있는 건축과 예술 작품에 대한 설명과 각 고장별 풍습, 순례자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조언 등이 담겨 있다.

순례길에 대한 관심은 날이 갈수록 커졌고 가톨릭의 위세가 유럽 전역에 꼭짓점을 찍었던 12~13세기, 산티아고를 향해 걷는 순례자들이 연간 최고 수십만 명에 달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과거 로마가 닦아놓은 길에 있던 작은 마을들이 도시로 성장하며 순례자들을 위한 병원과 숙소가 생기고 도로와 다리가 새로 놓였다. 팜플로나와 부르고스와 레온 등 각지에 대성당도 들어섰다.


그러나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이 물러나고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등을 거쳐 마침내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19세기 후반을 지나 현대에 접어들면서 순례길은 차츰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 갔다.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서구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무너지면서 로마 가톨릭의 교리가 더 이상 세상의 절대적인 진리가 아닌 것으로 인식된 탓이 크다.


20세기 중반까지 소수의 가톨릭 신자들과 성직자들이 걷던 산티아고 순례길이 다시 부흥의 시기를 맞게 된 계기는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방문하면서부터다. 교황의 방문으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의 역사성이 재조명받았다. 이와 함께 스페인의 지자체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의 원형을 되찾기 위한 작업을 벌였고 1985년 스페인 역사유산법 추가 규정 제1조에 따라 산티아고 순례길은 스페인의 문화유산 보호 제도 중 최고 수준인 문화적 관심 유산(BIC, Bien de Interés Cultural)으로 등록되었다. 1987년에 유럽회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유럽의 첫 번째 문화여행로’로 선포했고 마침내 유네스코는 1993년 산티아고 순례길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역사적 문화적 의미와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고 복원되면서 대중들의 호기심도 점차 높아졌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가 몰락하고 유럽 각국이 유럽연합으로 통합되면서 유럽 문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가톨릭을 되돌아보자는 분위기가 형성된 덕도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프랑스와 스페인, 이탈리아 등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 외에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 남미의 가톨릭 국가의 신자들이 초기 교회의 신앙적 아우라를 느낄 수 있는 순례길을 다시금 찾기 시작한 것이다.   


브라질 작가인 파울로 코엘료가 책을 통해 순례길에서 느낀 감상과 성찰을 남미와 유럽의 독자들에게 소개한 것도 산티아고 순례길의 순례자 증가에 큰 역할을 했다. 코엘료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재정비하던 시기인 1986년 남프랑스의 생 미셀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걸었다. 조국인 브라질에서 반독재 운동을 하다가 투옥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던 코엘료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계기로 작가로 각성하고 이후 ‘연금술사’ 같은 베스트셀러로 이름을 떨친다. 코엘료가 1988년 발표한 ‘연금술사’는 이후 20년간 세계 각국에 약 3000만 부가 팔리는 대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양치기 소년 산티아고가 인생의 의미를 찾아 떠나는 ‘연금술사’에 영감이 준 것이 바로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겪은 일화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코엘료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나서 쓴 ‘순례자’도 ‘연금술사’를 보다 풍부하게 해석할 수 있는 책으로 덩달아 유명해진다.  


‘순례자’와 ‘연금술사’는 코엘료의 명성을 높여준 작품인 동시에 ‘신’을 잃은 현대인들에게 자아 성찰과 삶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게 하는 책으로 서구 사회에서 일종의 ‘문화 현상’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덕분에 산티아고 순례길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의 종교적 체험의 구도의 길에서 세상의 빠른 변화에 잃어버린 자아를 조우하고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한 전 세계인들의 ‘순례길’로 거듭난다.  


사실 산티아고 순례길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야고보 성인의 전승과 무덤이 현재의 과학적 기술로 정확하게 검증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논리와 이성을 초월하는 믿음과 신앙의 영역에서 보면 야고보 성인의 전승과 그의 무덤은 의심 불가이겠지만 삼국유사에 기록된 박혁거세의 알 탄생 설화를 사실로 믿지 않는 것처럼 산티아고 순례길의 근원과 야고보 성인에 관한 숱한 전승도 일종의 허구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것이 현대인들의 합리적 판단이다.


그럼에도 산티아고 순례길은 현대에 들어와 논리와 이성의 확장으로 잠식되었던 사람들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며 해가 갈수록 순례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야고보 성인의 전승을 비롯해 가톨릭이라는 종교를 믿거나 말건 간에 그 길을 걸으면서 느끼고 경험하는 실체들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실체가 말이나 글자로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 혹은 우연과 필연이 얽히면서 일어나는 타인과의 공명 등 수치로 증명하기 어려운 상황의 총제이기에 가서 걸어보지 않는다면 선뜻 받아들이거나 이해하기 난감하다. 나 또한 그 길을 걷기 전 여러 순례기를 읽으면서 그 길을 동경하면서 또 의심했던 이유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또한 걸어서 대륙으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