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월영 Jul 24. 2018

산티아고 혹은 카미노 블루

산티아고 순례길 미완의 완주기 7

우리말로 파란색을 뜻하는 영단어 ‘블루’(blue)는 우울한 기분을 나타내는 형용사로도 쓰인다.


그래서 블루는 ‘디프레션’(depression)과 함께 영어권에서 우울증을 의미하는 단어로 활용한다. 신부들이 결혼을 앞두고 새롭게 펼쳐질 생활과 임신, 출산 등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뒤섞이며 겪는 심리적인 장애를 ‘메리지 블루’(marriage blue)라고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가약을 맺는다 하더라도 인생의 항로 자체가 바뀌는 결혼은 일상의 변화를 전제로 한다. 특히 그 변화는 일정 부분 포기와 책임을 강제한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다 보면 기분이 마냥 좋거나 가벼울 수는 없다.


때문에 결혼을 앞둔 신부가 행복해 보여도 내면에는 무언가 체념한 기분을 숨기고 있을 수 있다. 신부뿐만 아니라 신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감정의 평형이 깨져 있는 상태를 ‘메리지 블루’라 부른다. 정작 이런 메리지 블루를 사람들에게 표현하기는 어렵다. 결혼 앞에는 ‘행복하다’는 명제가 걸려 있어서다. 그러나 사람은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감정이 근육들이 각기 발달되어 있다. 다만 그것을 대놓고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이런 분열적 심리상태를 윤리적인 죄의식으로 억압하다 보면 병이 난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 선행해야 하는 것은 그런 상황을 병으로 규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메리지 블루’는 이런 맥락에서 생겨났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기 전에 정보를 얻기 위해 가입했던 인터넷 카페에는 ‘카미노 블루’라는 코너가 따로 있었다. 사실 그 코너가 있는 줄 몰랐다. 후기를 남기기 위해 다시 카페에 접속했을 때야 눈에 들어왔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와 겪는 후유증. 아마도 그것을 ‘카미노 블루’라고 지칭했고 그런 후유증을 나누고 치유하기 위해 코너가 마련된 것으로 추측했다. ‘기껏 다녀오고 나서 왜 우울할까?’라고 생각했지만 ‘아! 내가 카미노 블루를 겪고 있구나’라고 인정하기까지 시일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내 마음에 평화도 찾아왔지만 그만큼의 시기와 질투도 있었다. 우선 생장에서 산티아고까지 카미노 프린세스 전 구간을 걷는 이들을 보며 부러웠다. 길을 걸어보면 안다. 처음부터 끝까지 걷는 여정이 주는 설렘과 기대. 그 길을 함께 걷는 이들 간에 생기는 연대감과 친밀감. 공감대. 그 정서적 테두리가 주는 은밀한 소통과 일체감을 말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 정서적 만족과 여흥을 오래 누릴 수 없었다.


3주 휴가로 나온 탓에 2주 일정으로 중간에 버스를 타고 코스를 건너뛰는 순례 여정을 짰다. 생장에서 출발해 6일 남짓 걸었고 이틀을 버스를 타고 사리아에서 산티아고까지 5일을 걸었다. 시작과 끝은 걸었지만 완주를 한 셈은 아니다. 일정을 위해 같이 피레네 산맥을 넘었던 일행들과 헤어지면서 느꼈던 소외감은 이내 마음 한쪽에 깊이 남았다. 여기에 나는 왜 남들처럼 인생의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나? 싶은 자괴감부터 친구나 가족 등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이와 함께 그 길에 선 사람들을 보며 드는 부러움까지.   


막상 서울에 돌아와 다시 톱니바퀴 같은 일상으로 되돌아갔을 때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시 적응하는 스스로를 보며 놀랐다. 그럴 만했다. 월요일 오전에 인천공항으로 입국해 오후에 바로 회사에 나가 업무를 봤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여행의 감흥이 금세 사라진 듯싶어 아쉽기도 했지만 배낭을 짊어지고 종일 걷기만 했던 여행자에서 다시 성실한 직장인으로 돌아와 밥벌이에 전념하기 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일상에 바로 적응했다고 여긴 것은 착각이었다. 여행을 다녀온 뒤 몇 주가 흐른 다음 무언가 일상에 균열이 생기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 균열 사이로 마음이라든가 거창하게 영혼 같은 것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차츰 평소보다 잠드는 시간이 늦어지고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주말에는 계속 잠을 잤다. 일어나서는 최소한의 끼니만으로 배고픔을 면할 정도로만 먹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무기력이 엄습했다. 사람들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사소한 대화도 버거워졌다. 내면과 외면이 분리되어 허깨비를 뒤집어쓰고 회사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그 허깨비를 벗어던지고 기진맥진하는 일이 잦아졌다.


여기에 마흔을 넘은 물리적 나이가 주는 중압감이 전에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남들처럼 결혼하고 애를 낳고 사는 인생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거나 아니면 나에게는 그런 삶이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염려까지 미치면서 하루하루 가는 시간의 속도는 전보다 몇 배속으로 빨라졌다. 그 시간의 빠름 속에 나는 정체되어 있고 뒤쳐져 있다고 생각하며 자학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무언가 심리적인 균형이 무너졌다는 위기의식이 지속됐다. 그 원인은 복합적이겠지만 아마도 산티아고 여행을 다녀온 뒤 겪는 소위 '산티아고 블루'가 이른바 트리거로 작용한 듯했다. 산티아고에서 본 것처럼 저렇게 다른 삶이 있는데 왜 나는 정해져 있는 일상에 소모되는 일을 하며 인생을 마치 낭비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무의식 중에 머리에 남았다. 게다가 다녀왔다고 해서 삶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에 오히려 일상이 더 답답하게 느껴졌다.


내면의 경고등이 켜졌다. 혹시나 우울증 전조 증상이 아닐까 싶어 덜컥 겁이 났다. 라디오에서 들었던 서울시 정신보건 사이트에 들어가 우울증 테스트를 해보았다. 21점을 넘기면 우울증인데 딱 20점이었다. 위험 신호였다. 심리상담사를 찾았다. 한 시간 반 정도 여러 가지 검사와 상담을 했다. 현재 우울증 지수가 위험한 수준에 왔다고 우려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으며 자존감이 떨어져 있는 상황. 기질적으로 예민한 데다가 지금 하는 일에서 느끼는 압박감이 크다는 진단이 나왔다고 했다. 심리상담사는 자기표현을 하라고 권했다. 속내를 털어놓고 스스로를 너무 강박하지 말고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인정한 뒤 마음을 풀어헤치라고 조언했다.


비록 초기지만 우울증이라 불러도 무방한 상황에 왔다는 진단을 받은 뒤 우울증 증세를 우울한 기분과 비교해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기 위해 애썼다. 먼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아래로 쳐지는 무력감이 낯설었다. 사고와 인식의 폭이 극도로 좁아지는 느낌도 들었다. 평소 좋아하던 일에 아무런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숨이 막히는 느낌에 버거웠다. 함께 살고 있는 고양이 녀석의 재롱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뿐만 아니라 타인의 존재가 주는 무게감도 한 없이 흐려졌다.


웬만한 일에 감정이 움직이지 않았다. 무감각해지는 것과는 또 달랐다. 주변의 모든 일들이 하나의 풍경으로만 있을 뿐 내 삶에 직접적인 연관을 주지 않고 괴리되었다. 덕분에 극단적으로 차분해졌다. 그 차분함은 스스로에 대한 부정적인 객관화로 이어졌다. ‘이 지구 상에 수 천만 수십 억 명 중 하나에 불과한 내가 과연 이 세상에서 얼마나 의미가 있는 존재인가?’라는 질문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애써 이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하다 보면 그냥 ‘멍한 상태’가 되었다. 무중력 안에서 부유하는 느낌. 어항 속에서 산소 부족으로 호흡이 가빠지는 물고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울증이 무서운 점은 결국에는 본인을 둘러싼 관계들이 형성한 애정과 관심을 무가치하게 만들고 스스로 세상을 소외시켜 생명과 단절된 세상으로 간다는 것이다.


우울증 초기임을 인정 한 이후 이를 흘려보내기 위해 나름의 자구책을 강구했다. 억지로라도 글을 썼다. 글이라기보다 아무렇게나 자판을 두드리며 마구잡이로 감정을 토로하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재미있다는 동영상들을 찾아보았다. 다시 피트니스 센터에 등록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아 싫었던 러닝머신 위를 달렸다. 소셜미디어에 가벼운 댓글을 달았고 작은 감정이라도 공감하고자 했다. 그간 연락이 뜸했던 주변 지인들과 만나 근황을 이야기하고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퇴근길 가급적 걸었다. 평소와 달리 내 마음이 가는 것을 기준으로 남의 부탁이나 약속을 주로 거절했다. 주변 지인들에게 알리기는 부담스러워 익명의 공간에서 우울증에 따른 심리적 고통에 대해 공감대를 구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체감한 가장 긍정적인 경험은 오직 걷고 자고 먹는 일에만 집중하면 하루가 지나간다는 것이었다. 같은 하루라도 순례길에서 보낸 하루와 나의 삶의 근거지에서 느낀 하루는 근심의 무게가 달랐다. 이는 순례길의 하루가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가장 기본적인 육체적 행위인 ‘걷기’를 근간으로 짜여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걷는 것으로 그 길의 사람들은 국적과 나이, 성별을 초월해 평등했다. 숱한 위계 관계에서 ‘나’라는 가면을 지키기 위해 안절부절 애를 쓰며 그에 따른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하는 일상과 달리 평등한 상황에서는 보다 단순한 일에만 관심을 기울여도 생존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종일 걷고 나서 고된 걸음 뒤 허기를 채우며 만족하고 복잡한 상념 없이 눕자마자 바로 잠드는 하루. 덕분에 숱한 스트레스에서도 벗어났지만 역설적으로 스트레스에 대한 내성이 약해졌던 것이다. 그 여려진 틈을 타 우울증이 파고들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다행히 우울증은 내 안에 안착하지 않고 어느 정도 흘러내려갔다. 마음 어느 구석에는 그 잔여물이 남아 있겠지만 부지불식간에 스며들기에는 내면이 많이 견고해졌고 동시에 담담해졌다. 견고해졌다는 것은 무기력과 허무함에 대한 마음의 방수처리를 다시 했다는 의미이며 담담해졌다는 것은 행여 다시 우울증 증세가 온다 하더라도 이게 나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생명이란 유기체로서 면역력이 떨어졌을 때 걸리기 쉬운 바이러스 감염과 같은 상황이라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앓음’과 ‘극복’ 내지 '치유' 또한 멀리 보면 인생이란 순례길에서 마주치는 숱한 이정표들 중에 하나일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매거진의 이전글 길 바깥에서의 이심전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