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른이’ 나이는 어른이지만 아직 삶의 상황이나 심리적으로는 아이인 사람. (자체 정의함)
결혼하지 않으면 애 취급을 당했다. 결혼을 한 꼬마신랑은 자기보다 열 살은 많은 더벅머리 총각에게도 어른인양 뻐겼다. 불과 100년 전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부인하고 싶지만 결혼하면 어른이라는 공식은 현재에도 유효하다. 그래서 결혼하지 못한 혹은 아니한 사람은 나이를 먹어도 심리적으로 ‘아이’라고 여기는 부분이 있다. ‘어른이’라고도 부르더라. 아이라기보다 어른이 유예된 상황. 어른을 앞에 두고 계속 낙제를 하거나 혹은 나머지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 종종 기혼자들을 통해 인생의 ‘지진아’ 취급을 당한다.
2,
물론 기혼자들이 가지는 정신적인 성숙함이 있다. 특히 아이를 낳아 키우면 아무리 나보다 연배가 어리더라도 ‘어른’처럼 보인다.
아마도 유전자를 이 세상에 남기고 싶다는 종족번식의 본능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돌파한 데다가 또 자기 자식에 대해 맹목의 사랑을 실현할 수 있는, 나의 희생을 감내하고서라도 뭔가를 지키겠다는 그런 책임감이 은연중에 보여서다. 그럴 땐 자연히 ‘어른이’가 되어 은근히 주눅이 든다.
3.
눈물이 많은 편이라 은근히 민망할 때가 많다. 이 사회에서 눈물이 흔하다는 것은 별로 긍정적이지 않다. 하다못해 영화나 TV를 보다가도 훌쩍거리기가 다반사라 난감하다.
그런데 어쩌랴. 뭔가 타인의 심리적 곤란함과 궁지에 몰려 있는 상황을 보면 마음이 애잔해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진다. 여기까지는 흠이 아닐 수 있다. 문제는 스스로 뭔가 억울하거나 정확하게 의사표현을 하지 못할 때도 울먹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이건 아니지’ 하면서도 자제가 잘 안 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종종 느끼는 콤플렉스다. 이런 콤플렉스는 결혼해 어른이의 상태에서 벗어나면 해소될까? 생각해봤지만 난망할 듯하다. 이건 타고난 성정이니까.
4.
몇 해 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렀다. 염을 할 때 가서 지켜봤다. 다들 울었는데 나만 울지 않았다. 화장터에서 관이 불가마 속으로 들어갈 때도 다들 울었지만 울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어른이도 상황에 따라 어른도 되고 늙은이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다만 눈물이 흔한 것은 쓸데없는 감수성 탓. 그건 또 내가 지닌 유년의 트라우마로 인한 것이라고 스스로 정리를 하면서 내면의 불화를 해소할 수 있었다.
5.
다행인 것은 어른이와 이성적인 사고는 또 독립적으로 내 안에 공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내 안에 심리적으로 아이가 있고 미성숙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아주 침착하고 냉철하게 이성을 활용해야 한다고 스스로 자주 되뇌이면 비록 물리적인 ‘어른이’라 할지라도 인생의 여러 문제에 직면했을 때 해결책을 찾아내기 쉽다.
이성을 활용하는 기본이 바로 심리학 서적마다 나오는 ‘자기 객관화’다. 그러한 자기 객관화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감정에만 끌려갔을 때. 생각보다 순탄치 않은 인생들을 사는 걸 여러 경우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확인했다. 특히 결혼이 그러들 했다.
6.
다시 어른이로 돌아가면. 결혼을 하건 안 하건 결국 스스로를 객관화하고 자신이 어떤 좌표에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른이 아닐 수도 있다.
자기 객관화와 자기의 좌표, 자기의 분수를 알고 그 상황에 대해 이성적으로 파악이 가능한 사람. 그런 이들이 실은 어른일 것이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보지 않는다고 어른이 아니라면 그 많은 스님들과 신부님과 수녀님들을 가짜 어른인가? 어느 부분에서 아이 같고 어느 부분에서 철이 없다는 이유로 사람의 전체를 ‘아이’ 취급할 수 없다.
어느덧 불혹까지 살다 보니 그런 것은 있더라. 내 안의 그 심리적 아이와 놀아주다 보니 정작 혈육으로 이어진 아이를 잉태하기가 저어하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죄짓는 것도 아니고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니 계속 이리 살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저 어느 부분에서 순진하고 순수한 ‘어른이’를 골라 회식 같은 자리에서 ‘안주’ 삼아 이러쿵저러쿵 하는 ‘기혼자’들의 은근한 시샘과 부러움과 잔소리와 충고들이 이제는 피곤할 뿐이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