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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영 May 05. 2016

지리산, 아득한 산길에 안식이 있네

지리산 종주기 '상'

숙제였다. 고요한 밤하늘의 적막을 보며 내 주변의 인연들을 떠올릴 시간이 필요했다. 혼자서 걷는 짧은 순례이길 기대했다. 본격적인 산행 입문 후 30대에 마무리해야 할 뒤늦은 통과의례였다.


몇 해 전 건강검진 결과는 우려스러웠다. 지방간, 중증 콜레스테롤, 간수치, 과체중, 골밀도 취약, 엉망이었다. 의사는 술을 줄이고 운동을 하지 않으면 40대 이후 건강을 장담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마침 산이 가까운 서울 북쪽 동네로 돌아왔다. 홈쇼핑에서 12만 원에 세트로 파는 등산복을 구입하고 북한산부터 오르기 시작했다. 인터넷 등산 동호회에 가입해 설악산 토왕성 빙폭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해남 두륜산, 강촌 굴봉산, 양평 청계산 등등 어울려 다녔지만 뒤풀이 술자리의 번잡함이 피곤했다. 대열에 맞춰 내 산행 페이스를 조절해야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점차 혼자 산에 가는 날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여름휴가 때 지리산 종주를 목표로 세웠다. 고등학교 시절 소설 ‘태백산맥’을 읽은 후 지리산은 순례해야 할 성지처럼 마음속에 박혔다. 정작 대학에 다니며 여유가 있을 때는 지리산의 산길을 밟지 않았다. 군대 가기 전 가을. 화엄사에 잠시 들렀을 뿐이다. 그때 다짐하긴 했다. 언젠가 이곳 화엄사에서부터 멀리 대원사까지 지리산 능선을 하염없이 걷겠노라고.


7월 셋째 주. 지리산 종주에 앞서 사전 답사 성격으로 지리산 백무동에서 장터목, 천왕봉에서 중산리로 내려오는 무박 2일 코스를 다녀오기로 했다. 동서울터미널에서 밤 12시 백무동 가는 심야버스를 타고 3시간 30여분 달려 백무동에 도착했다. 5000원짜리 중국산 헤드랜턴은 초입부터 고장이 났다. 다행히 손전등이 있어 첫 야간산행을 시도할 수 있었다. 1000미터가 넘는 산행도 처음이었다. 4시간이면 오른다는 백무동에서 장터목까지 6시간 넘게 걸려 올랐다.


2010년 처음 지리산 등산에 도전해 천왕봉 오르는 길에 본 지리산 일대 산군과 구름 ⓒ월영


천왕봉에 오른 시간은 정오께였다. 거의 9시간이 걸린 셈이다. 감격에 겨워 다른 등산객에게 부탁해 사진을 찍고 한참을 있다가 순두류까지 간 다음 법계사 셔틀버스를 타고 중산리로 내려왔다. 오후 3시가 넘었다. 일주일 후 여름휴가를 냈고 처음 이틀은 몸살 기운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A형 간염. 바로 입원했다. 수인성인 간염은 산에서 동물들의 배설물 때문에 걸릴 수도 있다고 했다. 지리산 초행 때 물을 갈아 마신 탓으로 여겼다. 지리산 종주는 다음 기회로 넘겨야 했다.


그때부터 지리산 종주는 마무리하지 못한 숙제처럼 늘 찜찜하게 남아있었다. 물론 이후에 지리산을 예닐곱 번 정도 찾아 지리산 주능선에 얼추 발을 디뎠다. 한신계곡에서 역종주를 해 뱀사골을 거쳐 반선으로 하산하거나, 성삼재에서 반야봉을 찍고 원점회귀를 했다거나, 혹은 백무동에서 대원사까지, 성삼재에서 피아골, 백무동에서 거림 등등. 그럼에도 화엄사에서부터 대원사까지 약 46킬로미터의 화대종주는 하지 못한 셈이니 지리산 종주는 계속 미완이었다. 완성해보고 싶었다. 누가 시키지 않았기에 더욱 하고 싶은 일이었다.


낮 12시 30분. 구례터미널에 도착했다. 날은 화창했다. 멀리 노고단과 지리산의 주능선이 한 눈에 들어왔다. 구례읍내 외각을 흐르는 개천에서는 기러기인 듯, 청둥오리인 듯 새끼 몇 마리가 작은 날개로 물 위를 박차며 날아오르는 연습을 하는 게 보였다. 갈대 사이로 분산되는 햇볕의 농도가 제각각. 농염하게 늘어진 감나무에 매달린 홍시들도 다홍색으로 반짝거렸다. 도시의 일상에서는 인지할 수 없는 자연의 순리들은 이처럼 시곗바늘처럼 아귀가 맞지 않으면서도 나름의 시간표대로 순행 중이었다.


성삼재로 올라가는 버스를 탈까? 잠시 고민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화엄사에서 연기암을 거쳐 노고단까지 오르

는 그 길이 원래 지리산 종주의 시발점이었다. 노고단까지 길이 찻길이 놓인 것은 근래의 일. 화엄사행 버스에 올랐다.


구례 화엄사 20년전 갔을 때보다 더 정갈졌지만 특유의 고졸한 멋은 그전처럼 웅숭하지 못했다ⓒ월영


17년 전 20대 초반. 군대 입대를 앞두고 한 학기 휴학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나오는 남도 여행을 꼭 해보고 싶었다. 아는 형의 고향인 무안에 갔다. 지도라는 섬 앞의 포구에서 무진기행에 나오는 안개보다 더 막막한 안갯속에서 낚시질을 했었다. 광주 비엔날레에 들러 현대미술의 전위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담양 소쇄원에 들러 처음 본 대나무 숲의 결기에 마냥 놀랐다. 망월동 5.18 묘역에 들러 비명에 쓰인 글들을 보고 울었다. 


그 여정의 마지막 길이 섬진강 따라 곡성, 구례. 화엄사였다. 화엄사에서 일기장을 펼쳐 몇 마디 끼적였다. 일기장은 아직 버리지 않았지만 펼쳐본 지는 오래. 무슨 말을 적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10월 하순의 스며드는 가을빛에 적적해하며 화엄사 대웅전에 앉아 누군가를 그리워했던 것은 선명하게 떠올랐다.


강산이 두 번 바뀔 시기였기에 화엄사도 변했다. 세월의 쇠락을 감내하며 고즈넉하게 풍화되던 화엄사의 정경은 보살님들의 불전으로 치장됐다. 담 옆으로 길이 나 주차장이 됐고 흙마당에는 큰 섬돌들이 깔렸다. 중창불사로 절은 더욱 커진 듯했으나 내 마음속 화엄사의 크기는 줄어들었다. 화엄사가 생활의 공간인 분들에게는 문명의 편리를 거부하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그 편리가 요기를 부리지 않고 공간 안으로 무던히 스며들지 보다 고민을 하면 좋았을 것이다. 선사들은 늘 마음의 눈을 중요시하지 않았던가.


연기암으로 올라가는 직선로를 물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표지판에 가리키는 대로 우회로로 올랐다. 약 5킬로미터. 한 시간 동안 빠른 걸음으로 연기암으로 오르는 우회로를 걸었다. 굽이굽이 도는 길을 걸으며 심호흡을 자주 했다. 지리산 속으로 들어왔다는 기분에 절로 몸에서 흥이 솟아났다.


연기암 입구에 닿으니 화엄사에서 직선으로 치고 올라오는 등산로와 마주쳤다. 그 코스는 약 2킬로미터. 괜히 돌아왔다는 후회가 들기도 했지만 평탄한 길이었다고 위로했다. 연기암 입구에는 지리산 노고단을 전경으로 하는 카페가 있었다. 젊은 부부인지 커플인지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손님은 나 홀로. 산 중 아이스커피 호사를 누렸다. 몇 마디 물어보려다 말았다. 시샘에 겨운 말들이 나올 것이 분명해서다.


연기암에서 코재에 오르는 길. 한신계곡 코스보다는 훨씬 수월했다ⓒ월영


오후 3시 30분쯤부터 연기암에서 코재로 오르는 길을 타기 시작했다. 경사가 급하고 지루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내심 긴장했다. 미리 겁을 먹어서였는지 길은 예상보다는 평탄했다. 오르막길이 계속됐지만 비교적 온순한 길이었다. 단풍은 아직 곱지 않았고 듬성듬성 불타고 있었다. 코재 거의 도착할 때쯤 석간수가 흐르는 곳이 있었다. 땀에 젖은 옷을 벗고 냉수마찰을 했다. 가을빛은 사위어 별이 뜨기 시작했다. 낙엽 지는 소리는 더욱 커졌다. 다시 힘을 내 십여분 오르니 코재. 노고단으로 오르는 큰 길이 나왔다. 하루의 정염은 주홍색으로 응축되다가 순간 폭발하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시계는 오후 6시 20분을 가리켰다.


노고단 대피소는 리모델링 한 덕에 시설이 깨끗했다. 대피 소안 숙소에는 서른 명 정도가 짐을 풀고 쉬고 있었다. 취사장으로 가 새로 산 가스버너에 불판을 얹혀 고기를 구워 먹었다. 반주는 많이 하지 않았다. 혼자 고기를 구워 먹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에 자랑질을 했다. 남이 없으면 내가 없다는 건 그럴 때마다 절감한다. 반응하는 타인이 없다면 세상은 또 어떤 재미로 살 수 있을까.


코레일 소속 직장 등산 동호회에서 오신 일행분들이 말을 걸었다. 자신들은 노고단에서 머물다 다음 날 내려간단다. 종주한다고 하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인다. 젊을 때 하는 것이라며 경험담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커피를 권했다. 노고단 취사장에서 원두를 갈아 내린 커피를 마셨다. 하와이안 무슨 원두, 그리고 콜롬비아 무슨 원두란다. 뜻하지 않은 호사에 꾸벅 인사했다.


취사장에 나와 노고단 너머 뜬 별자리를 헤아리며 원두커피를 마셨다. 휴대전화를 꺼내 익숙했던 번호를 눌렀다. 역시 받지 않았다.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지리산 노고단에서 밤하늘 별빛을 보니 생각이 났다고. 유치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상쇄시키지 아니하면 더 괴로울 할 감정들이란 것도 알기에 전송했다.


어찌 단번에, 소위 쿨 하게 잊을 수 있을까. 서로 사랑했다는 건 그만큼 서로 방어기제 없이 어린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관계이기도 했단 것이다. 서른 후반,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성인의 치열함에서 예닐곱 살 때 묻지 않은 동심의 치기까지. 그 감정의 간극을 자연스럽게 오갈 수 있는 관계. 심신을 마음 편히 환기할 수 있는 통로가 닫혔다는 게 실은 이별의 가장 큰 갑갑함이기도 했다. 그 갑갑함의 바람을 빼기 위해 유치한 행동을 할 수밖에. 유치한 마음의 끝트머리가 종종 가장 날카롭게 현실을 상기시키지 않던가.


노고단 대피소에서 맞이한 석양의 풍경ⓒ월영


끼니를 채운 후 랜턴을 끈 채로 노고단 대피소에서 코재까지 길을 돌리며 어슬렁거렸다. 밤바람은 차가웠지만 그 차가움이 반가웠다. 명징한 불빛이 주는 청정함은 오염되지 않은 어둠일수록 선명하다. 밤하늘은 초롱거렸고 별자리들은 은하수 주변을 원을 그리며 운행했다. 산 아래 구례읍내의 불빛들은 은하수보다 길게 흘러갔지만 혼탁했다. 노고단 너머로 지는 유성우를 보며 명복을 빌기도 했다. 


둘째 날 몸을 쉴 곳은 새석산장. 온종일 걸어야만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몇 번 구간을 끊어 걸어봤다. 다만 날이 맑을 때 그 길을 걸어본 적이 없어 가늠이 제대로 되진 않았다. 커피 탓인지 잠은 듬성듬성 왔다. 노고단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서는 오전 6시 20분에는 대피소를 나와야 했다. 잠이 오지 않아 결국 아이패드를 켜고 기도문들을 속으로 암송하기 시작했다. 스르륵 잠이 오기 시작했다. 지리산 종주의 첫날밤은 그렇게 저물었다. 다행히 꿈속에서 성탄절에 태어나신 분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지리산 종주기 '중'

https://brunch.co.kr/@doksin/22

지리산 종주기 '하'

https://brunch.co.kr/@doksin/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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