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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신 공감

당신의 간접체험을 위하여

독신공감

by 월영

취업 이후 요 몇 년간 가장 안정적이고 단조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 내 일상의 예측가능성이 요즘처럼 컸던 시기가 또 있었나 싶을 정도다. 규칙적으로 일어나 출근을 하고 다소 기능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다가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한 다음 또 과하게 에너지를 쓰지 않고 오후 업무를 하고 퇴근 시간이면 내일에 대한 딱히 불안감이나 걱정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또 여유롭게 집으로 온다.


집에 와서 저녁을 차리고 찬찬히 끼니를 먹은 뒤 설거지를 하고 페이스북 같은 곳에 적당히 자기 자랑과 의도한 호응에 살짝 자존감을 고양시킨 후 술 한잔 옆에 놓고 인터넷 서핑을 하거나 유튜브를 보거나 혹은 인터넷 쇼핑몰에서 사고 싶은 물건들을 실컷 아이쇼핑한다. 틈틈이 송이랑 놀아주면서 정서적 교감도 나누고 피곤해지면 씻고 잠자리에 든다.


이런 루틴한 일상이 몇 개월째 반복. 저자극과 저강도의 노동 및 낮은 강도의 스트레스가 과연 나에게 합당한 것인가? 의심이 들 때도 있을 만큼 불안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간 내가 너무 일과 삶의 균형감각 없이 살았을 수도 있단 생각도 든다.


물론 나는 기자로 그렇게 부지런하거나 취재열정이 넘치던 사람은 아니었고 아무리 바쁜 와중에도 놀건 놀고 쉴건 쉬었던 조직원이었다. 그래서 주변 눈총도 받았고 그 눈총에 딱히 연연하지도 않았던. 그럼에도 지금처럼 단순, 반복의 직장인처럼 사는 날들이 내 직업의 지난날 중 많지 않았기에 이 상황이 생경하면서도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잘 적응하고 있다.


이런 루틴한 일상을 살다보니 또 여러 가지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우선 살림에 대한 이해가 한층 더 나아갔다. 사실 1인 가구다보니 내 끼니만 잘 차려먹고 내 옷만 잘 세탁하면 되고 내가 어질러 놓은 것만 청소하면 된다. 그러나 식구들의 일상을 건사하기 위해 1인분이 아닌 몇 인분의 살림을 한다면 내가 지금처럼 여유로운 생각을 할 수 있진 않을 거 같다. 그리고 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그 지루함과 권태를 이겨내기 위해 아마도 식기와 의류, 혹은 인테리어 등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겠구나 싶다.


집이라는 공간은 변화가 적고 낯선 이들이 오는 공간이 아니다. 이 공간에서 종일 일상의 여러 일들을 종일 반복한다면 그에 따른 갑갑함과 답답함 그리고 소외감이 있을 듯 싶다. 딱히 어떤 성취도 없는 생활의 반복. 이 지점에 대해 간접체험을 넘어 동기감응하는 지점들이 있다.


그리고 또 보이는 건, 살림살이의 숱한 도구들이 무척 세분화되어 이미 시장에 나와 있다는 점이다. 그런 측면에서 다이소 같은 매장이라던가 대형마트 등에서 파는 물품들을 볼 때 내심 감탄한다. 그 수천가지 물품들이 일상의 곳곳에 저마다 역할을 하고 기능을 한다는 점을 나는 피상적으로 알았을 뿐. 실제 그런 물품들을 사용해보면 씻고 먹고 자고 치우는 모든 일상의 행위마다 그 동선과 패턴을 얼마나 고민했을지가 느껴진다. 그게 요즘 꽤 신기해하는 부분이다.


하여 내가 그간 일했던 과정에서 썼던 숱한 관념어들이 지닌 휘발성이랄까? 아니면 그 언어가 주는 권위나 위압감 혹은 우월감에 취해 실제 생활의 여러 구체적인 무엇 하나 제대로 익히지 못한 내가 나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고 있지 않았나 싶다. 그런 연상선상에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무엇에 대한 글을 쓰는 것도 많이 참고 있다. 또 너무 고관여했던 분야. (사실 고관여층 중에서는 그렇게 고관여자는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평균보다는 고관여였음은 부인하지 못한다)를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보는 연습도 하고 있다. 중화작용 내지 해독작용이라고 속으로 합리화하면서 말이다.


지금과 같은 루틴한 일상이 얼마나 더 이어질지 잘 모르겠다. 입신양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사안이 폭발할 때 그 안에 뛰어들어 호승심을 꺼내보고 싶은 마음 역시 없지 않다. 하지만 그게 어떤 공의나 대의를 위해 사사로움이 전혀 없는 행위가 아니라는 걸 이젠 좀 자각하고 있다. 사람이 그런 사사로움 없이 어찌 일의 동기부여가 될 수 있나고 반론할수도 있다.


그런데 이제 나아 마흔 중반을 넘어 후반에 접어드니 사사로움을 더는 연습을 하는 게 결국 가장 중요한 인생의 후반을 접하는 훈련이란 생각이다. 인간의 추함 중 노욕이 가장 무섭다고 하기에 그렇다. 얼마나 그런 다짐이 이어질지야 자신이 없지만 아주 잠시라도 어떤 말을 할 때, 어떤 글을 쓸 때, 그 안의 동기가 무엇인가를 괴롭지만 들여다보려 한다.


때문에 이 글을 쓰는 동기 역시 결국 자기자랑이다. 이런 자기자랑을 하는 이유는 은근히 내 나이에 이런 일상의 루틴과 안온함과 평정을 자랑하는 분들이 없어서기도 하다. 기혼자들은 지금 이 시기에 이렇게 살고 있으면 본인에겐 마음의 평화가 올진 몰라도 가족들에겐 마음의 울화가 생길 수도 있으니 지양하셔야 할 터.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부간 부모자식간 희로애락을 체감하며 삶의 비의를 깨닫거나 성숙의 고통과 관계의 책임을 견뎌내고 계실터이니. 내가 대신 홀로 사는 허허로움과 자유로움과 또 어찌보면 관조의 시간과 만족의 불혹 후반을 살아드리고 있음을. 간접 체험하시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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