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쑥 곱게 포장된 상자를 내밀었다.
“월영씨 지갑이 너무 낡았더라구요.”
아마도 벚꽃과 라일락이 교차되던 시점의 봄날 어느 날이었다. 비혼주의자라고 처음부터 못 박았던 그 사람은 “이러면 안되는 데” 하면서 내게 마음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색깔은 푸른색이라며 색상이 마음에 들련지 궁금해했다.
남들처럼 연애를 시작했고 가끔 싸웠고 밤새워 통화하며 화해했고 그러다 헤어졌고 다시 만났다. 다시 만난 그날은 온통 사람들로 북적이던 크리스마스 즈음 명동의 복판이었고 둘은 추위에 빨개진 코를 보며 서로 웃었다.
그리고 일 년 뒤 둘은 분당 중앙공원 근처 어느 카페에 앉아서 그간의 연애를 복기했다.
“헤어지면 나 보다 어린 분과 빨리 결혼해서 잘 살거에요.”
”아닙니다. 그건 H씨 말이 맞지 않을 거에요. 난 결혼하고 싶어 H씨를 만난 것이 아니라 H씨라서 결혼을 하려 했던 것이니까요.“
정확히 이런 대화를 나눴다고 확신할 순 없다. 기억은 왜곡되고 적당히 내 위주로 재편되어 남아 있기에 그렇다. 하지만 분명한 건 헤어지는 여자는 남자의 결혼을 미리 축원했고 남자는 그 말에 계속 고개를 저었다.
영화 크래딧이 올라갈 때 그 사람의 이름을 확인했다. 잘 살고 있구나. 하지만 몇 해전 부터는 그 사람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본인의 꿈을 포기한 것일까? 아니면 늘 하던 말처럼 세상서 숨어 그저 무명의 누구로 살아가기로 작심할 것일까? 메일주소는 남았지만 그 사람이 쓰던 메일 회사는 문을 닫았다. 물론 그 전에 보냈던 메일은 답장이 없었다.
두 어 번 통화가 되었다. 그 대화의 끝은 선명하지 않다. 다시 연락을 한다고 했었는지, 하지 말라고 했었는지. 그때 우리가 어떤 오해를 했었는지, 어떤 미련이 남았는지 이런 이야기를 다 했는지 아니면 끝내 못하고 그저 다시 서로의 안녕을 바랐는지 이제야 희미해졌다.
2015년 12월 25일. 그 사람과 헤어졌고 오늘로 10년이 흘렀다.
이건 무슨 심리일까? 당신 말이 틀렸다고 증명하려 했던 남자의 옹졸한 자존심일까? 아니면 남들보다 더딘 이별의 기간을 증명하고 싶은 어리석은 순정일까? 그 물음에 대한 답도 이젠 딱히 궁금하지 않을 정도로 나는 세월을 지나왔고 무디어졌고 무던해졌고 혹은 단단해졌다.
그 10년간 단단해진 마음 덕에 이제 정말로 놓아준다. 이제는 그 푸른빛이 바라고 바란 이 지갑과 함께.
지난 10년간 타전했던 내 숱한 글들의 어느 조각 하나는 당신의 일상에 한 번쯤은 닿았기를 간절히 빌면서.
또한 당신 삶 역시 무탈하고 무던하게 이 연말을 보내길 있기를 진실로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