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신으로 산다는 것 10
'관계의 친밀성'

by 월영

1.

절친 녀석과 오래간만에 통화했다. 퇴근 후 부서원들과 술자리란다. 여전히 술 쳐먹냐며 십 몇 분을 티격태격했다.


대학교 때 같은 동아리에서 친해지면서 단짝이 됐다. 대학 내내 붙어 다녔고 서로 군대 있을 때는 면회도 자주 다녔다. 심지어 녀석의 자취집에서 햇수로 2년 정도 얹혀살기도 했다. 그때 알았다. 아무리 허물없이 친한 동성 친구 사이도 한방을 쓰면 뭔가 서로 서운하거나 실망할 일이 생긴다는 것을. 그러니 결혼해 이성과 한방을 쓰는 게 만만한 일은 아니겠구나.


그럼에도 녀석과는 사내들끼리 무슨 할 이야기가 많았던지 술도 꽤나 마셨고 여행도 몇 번 같이 다녔다. 성격이나 취향은 서로 다른데도 마음이 불편했던 적은 없었다. 김민우 노래에 나오는 ‘휴식 같은 친구’였다.


2.

각자 직장에 들어가 사회에 적응하느라 전처럼 자주 만나 술을 마시진 못했다. 몇 달에 한 번 전화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사이기에 무소식이 늘 희소식.


언젠가 "이십 대엔 왜 연애를 안 했어요?"라고 누군가 묻기에 "짝사랑만 해서 그랬습니다"라고 답을 해놓고 다시 생각해봤더니 절친 녀석과 붙어 다니느라 그다지 다른 관계에 대한 아쉬움이 없어서였던 것 같다.


이성에겐 끌리지만 동성은 막역하다. 그 막역함이 이성에 대한 연애감정보다 더 편했고 익숙했다. 직장을 잡고 삼십 대 접어들어서는 녀석과 시간을 내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또 막 보고 싶거나 그런 것도 없어 분기별로 보거나 반 년 만에 보는 적도 몇 번 있었다.

01.jpg 영화 '건축학개론' 중 한 장면



믿는 게 있었다. 서로 가끔 술 취하면 전화해 "인생 그렇게 살지 말아라" 타박하고 이 XX 저 XX 욕하고 끊어도(남자들 특유의 친밀감의 표현) 전혀 의가 상하거나 기분이 나쁘지 않은. 그 관계의 밀도가 촘촘하지는 않아도 대신 튼튼하고 넓은 사이.


3.

외로움이란 결국 ‘관계’의 바깥에 있다는 인식이다. 사람을 만나려는 근본적인 이유는 결국 어떤 것도 채울 수 없는, 대신할 수 없는 ‘관계’에 대한 욕구다. 그리고 그 관계의 친밀성을 평가하면서 불행하다 여기거나 혹은 행복을 느낀다.


관계의 친밀성에 있어 궁극은 아마도 서로 사랑하는 연인일 것이다. 서른 중반까지 서로 사랑하는 연인은 없었지만 관계의 친밀성에서 크게 부족하거나 아쉬운 게 없었다. 절친 녀석을 비롯해 또 정을 나눈 지인들 덕이었다. 그렇지만 서른 후반쯤 되자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도 슬슬 ‘관계’의 바깥으로 밀려나는구나'. 아니 '내가 벗어나는구나'.


그때 간절히 인연을 바랐고 만났고 ‘둘만의 관계’가 서로의 삶에 중심이 됐다. 하지만 서둘렀고 서툴렀고 결국 엇나갔다.


4.

절친 녀석은 녀석의 회사에서 소문난 워커홀릭. 최연소 승진 기록을 연거푸 세웠다. 성격도 좋아 선후배를 막론하고 녀석과 술을 먹기 좋아한다. 저녁때 전화 걸면 대부분 회사 사람들과 술자리. 아마도 내 절친 중 대기업 임원이 될 확률이 현재로선 가장 높다. 은근히 자랑스럽고 또 애잔하다.


녀석은 군대 있을 때 사귀었던 처자와 헤어진 후 독신을 선언했다. 물론 중간에 결혼하려 했던 처자가 있지만 그 처자들은 녀석의 몇 가지를 의심했다. 그중 어떤 처자라도 "괜찮아. 둘이 같이 열심히 벌면 되지." 이 한 마디를 했다면 녀석의 인생도 달라졌을까?


5.

결혼에도 저마다 사연이 있듯이 독신에도 저마다 사연이 있다. 세상 어딘가에는 결혼시기를 지나 혼자 살았던 사람과, 살고 있을 사람과 또 이렇게 살아갈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다만 요즘 독신이 전보다는 많아진 것은 사실이고 독신의 이유도 조금 더 세분화되었겠지만 본질적으론 같다.

결혼을 안 했거나 못한 것이다. 혹은 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누가 독신으로 살건 말건 간에 이 지구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그게 아주 큰일 날 것처럼 호들갑스럽게 모두 고민해줄 문제는 아니다. 남의 독신도 마찬가지.


6.

조직 내 이런 저런 스트레스로 갑갑했던 하루. 그래서 절친 녀석에게 괜히 전화해서 매번 반복하는 래퍼토리 " 인생 그렇게 살지 마라" 시니컬하게 잔소리하고 그랬다. 그렇게 십여분을 서로 욕을 섞어가며 수다를 떨었다. 모처럼 ‘관계’의 안으로 들어온 느낌.


7.

물리적인 나이도 독신의 전제 중 하나다. 우리 사회에서는 남자는 삼십 대 중후 반부터 여자는 삼십 대 초반부터 싱글로 살고 있으면 독신의 범주에 넣어버린다. 그 범주에 들어와 보지 못한 사람들은 또 이 안이 궁금할 것이다. 아니면 안쓰럽거나 왜 저렇게 살지 한심스럽게 생각할 수도.


그러나 독신은 결혼이라는 ‘관계’가 만들어 놓은 불가피한 서로가 상황에서 자의건 타의건 자유로운 사람.


f9bb3b6dff274499eb3827674fc09685b2163515.jpg 영화 '쇼생크 탈출'의 한 장면. 자유의 기쁨을 온 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여 그 자유를 지겹도록(?) 느껴보지 못한 이는 또 인생의 한 면을 모르는 것이다.


물론 '결혼 관계' 안에서 평화와 안식과 소통과 일치와 또 불안과 의심과 후회를 무한 반복 중인 기혼자들의 삶을 나 역시 안다고 말하지 않으련다.

매거진의 이전글독신으로 산다는 것 9 '기혼자들의 뻔한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