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신공감
지인들로부터 소개팅 제의를 받는다. 전화번호 줄 테니 만나보라 한다. 얼추 직업과 나이 정도는 알려준다. 외모는? 대놓고 물어보진 못한다. 어차피 나도 ‘외모’로 이른바 먹고 들어갈 형편은 아니니까.
고민 한다. 만날까 말까. 일정을 확인해본다. 이번 주 내내 야근이 걸릴 듯하다. 기획서도 올려야 하고 다음 주에는 출장과 당직도 껴 있다. 머리속 계산기를 두드린다. 연락해서 주말에 만나면 몇 시간을 써야 하지? 최소한 반나절은 시간을 내야 한다.
만나는 이성이 없는 상황. 적적하고 외롭지 않냐고 묻는다. 로봇도 아닌 멀쩡한 사람인데 아니 외롭겠는가. 하지만 외롭다는 느낌이 하루 종일 드는 것은 아니다. 회사에서 온갖 일에 치여 겨우 퇴근하고 돌아오면 씻고 자기도 바쁘다. 주말에 이런 저런 경조사라도 끼면 일주일 중 하루도 온전히 쉴 시간이 없다.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나 외롭지 않을 때도 있지만 단지 같이 있다는 상황 자체가 귀찮을 때도 있다. 누가 곁에 있다는 오직 하나의 이유로 피곤하고 그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도 있다. 육아를 하는 지인들을 보면 확신이 든다. 내리사랑이라는 자식조차도 때론 짐이고 근심 덩어리. 내 피붙이에서도 가끔 도망치고 싶다는데 다른 '타인'은 오죽하겠는가.
무엇보다 내가 지닌 생존 에너지의 한계가 점점 명확해진다. 회사에서 밥벌이 하고 그 경쟁에서 버티는 것만으로 이미 내 에너지의 절반 이상을 소모한다. 주변의 기혼들을 만나면 혼자 사는 삶이 부럽다고 정말 거짓없는 눈빛으로 말한다. 홀로 있어 '충전'하고 싶은 시간이 필요하단다. 함께 있으면 살의 에너지도 2배 이상 방전된단다. 그런말 하지 않아도 이미 온 몸으로 체감 중이다.
소개팅에 나간 경우. 부담 없이 만나 가볍게 시간을 보낸다 해도 이후 실금 같은 후유증이 생긴다. 호감을 느끼면 관계를 어떻게 발전시킬지 궁리해야 하고 호감이 없으면 ‘그래 내 인생에 무슨’. 하는 자괴감이 남는다.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인 상황. 그러나 안 하면 적어도 내 생존 에너지는 소모되진 않는다.내가 가진 감정은 마이너스로 가지 않는다. 안 만나면 일단 리스크 제로다. 어쨌든 체력도 회복.
나이 들면 체력만 약해지는 게 아니다. 이성과 있을 때의 감정 탄력성도 떨어진다. 감정의 진폭과 긴장을 견디어 내는 힘들이 전 같지 않다. 감정이 한번 극점과 극점을 오가면 일상의 평정을 회복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그 후유증은 아프다기보다 짜증이 난다. 소개팅을 하러 나가면 좋건 싫건 감정에 물리력이 가해진다. 그 물리력에 따른 일상의 진동을 감당해야 한다. 일상의 진동은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만으로도 벅차다.
계산기 두드린 끝에 만나지 않는다로 결론. 적적하고 외롭지 않아. 스스로 감정을 어느정도 왜곡시키고 다시 집에서 뒹굴거리며 드라마 속 상황으로 연애감정을 대체한다. 혹은 취미 생활로 도피한다. 초식남, 건어물녀. 남들은 별명을 잘 붙인다.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대개 이십대 혈기 왕성한 시대 멋도 모르고 들이대거다가 차인 경험도 없지 않다. 말 못할 '화인'하나씩은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또 혼자 고민. 공주나 왕자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그냥 일상의 어느 곳에서 괜찮은 사람이 있고 그 사람 또한 나를 괜찮게 여겨 드라마틱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러운 만남이 되길 바랄 뿐이다. 소개팅이 뭐 그리 대단한거냐고 하지만 한편으론 주선자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간접적으로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서로간의 기대치와 평가를 직시해야 한다. 거기서 오는 인간관계의 묘한 어긋남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느니 이것저것 고려해 또 소개팅 포기.
이렇게 나이는 먹어가고 주변에선 ‘눈 높다’ ‘까탈스럽다’는 말을 듣는다. 꼭 그런 것은 아닌 듯 한데 또 딱히 반박하기도 귀찮아 어느순간부터 그러려니 한다. '1인· 독신가구 증가'. '이혼률 상승', '양육에 허리 휜다', '데이트 폭력 빈발' 이런 뉴스나 기사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위안을 얻는다.
지인들은 말한다. 그러다 소개팅도 끊어지면 네 가능성도 끝난 것이라고. 속으로 냉소라고 하기엔 '시크'한 늬앙스로 답한다. 소개팅 끊어지는 것보다 실은 이 사회에서 월급 끊어지는 게 더 걱정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