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신 공감
1.
제법 흰머리가 늘었다. 아직 정수리와 이마 쪽에는 흰머리가 보이지 않지만 양쪽 귀 위에는 흰머리가 눈에 띌 정도다. 하기야 나이가 마흔이니 흰머리가 나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다만 생각이나 정서, 세상을 보는 시각은 예나 지금이나 별 달라진 게 없는데 속절없이 흰머리가 나고 주름이 생기고 눈에 보이는 변화가 새삼스러울 따름이다.
그렇다고 나이를 먹고 노화가 진행 중인 사실이 딱히 한탄스럽지는 않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니까. 누구나 나이를 먹고 그 나이만큼의 얼굴에 세월을 새겨 넣는다. 이왕이면 내 얼굴과 외모에 그 세월이 차곡차곡 순수하게 새겨졌으면 좋겠다. 억지로 그 세월을 거부해 내 나이 때보다 쓸데없이 젊어 보이고 싶지 않다. 인위적으로 젊음을 유예하고 싶지도 않다. 잘 늙어 주변에 누가 되지 않을 무렵 어디서 객사하거나 노환 없이 평안하게 세상을 떠나는 게 가장 큰 소원이라 그렇다.
2.
쉬는 주말에 등산이나 자전거 타기 외에는 별다른 외출을 하지 않는다. 한때 끼니를 굶고 봤던 영화나 연극, 뮤지컬은 이제 크게 흥미를 주지 않는다. 무대 위, 혹은 스크린에서의 자극이 피곤해서다.
산은 나를 자극하거나 뭔가 주입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스스로 계절의 변화에 순응해 누가 보건 말건 홀로 주어진 자신의 삶을 그 자리에서 견뎌낸다. 올라가는 과정에서 흘리는 땀도 좋고 별 생각 없이 바위등성이에 앉아 바람을 맞고 새소리를 듣고 구름을 보다가 가져간 맥주 한 캔 마시고 허허롭게 있다 오는 게 좋다.
자전거는 내 몸이 기계와 맞물려 가장 정직한 힘을 낸다는 점이 좋다. 그 힘으로 마치 100리 넘어도 내 영역인양 훌쩍 다녀오는 것이 좋다. 특히 해질녘 한강변 자전거도로를 주행하며 노을이 지는 야경에 꽃바람 강바람 가르며 달려 나가는 그 느낌은 황홀하기까지 하다.
3.
사람인지라 홀로 있다 보면 적적하다. 서로 교감하는 이성과 산행도 같이 가고 싶고 함께 자전거를 타고 바람도 쐬고 싶다. 허나 어느새 그건 그저 마음속의 바람일 뿐 딱히 욕망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는 세상의 숱한 번잡함과 고단함과 갈등을 피하고 싶은 이기심만 커져서다. 계산에 따른 손익계산만 빨라졌고 그 손익을 누리거나 감내하느니 차라리 당장의 평온과 담담함이 속편해서다.
가끔은 대인기피증이 걸린 게 아닐까 걱정한다. 냉정하게 스스로를 돌아보면 어느 정도 우울증 혹은 조울증 초기 증상도 있고 대인기피증도 있는 게 맞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 밥벌이하는 이들에게서 그 정도의 증세가 없는 이들이 어디 있나 싶어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게다가노총각히스테리가 발현해도 이제 이상치 않는 상황까지 왔다.
4.
모처럼 스스로를 위한 글을 쓰고 있다. 누군가를 의식하기보다 내가 나를 정리하기 위해 별다른 기교 없이 적는 글. 하지만 이 말은 또 거짓말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위한 글도 결국 남을 의식하지 않고는 쓸 수 없다. 누군가는 이 글을 통해 나에게 긍정적이거나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기를 바라는 ‘속내’는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한 가지 다행은 내 스스로 쓰는 이 글도 내 일부만을 보여주거나 혹은 남에게 나를 속이는 포장지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역으로 남의 쓴 글을 보는 내 눈도 그러하다. 하여 사람을 제대로 알려면 직접 만나서 겪고 시간을 같이 보내봐야 안다.
5.
비도 내리지 않은 가을밤인데 이리 청승거리는 이유는 단순하다. 오늘 아침 마지막 민방위 소집을 다녀와서다. 지난 시절 술자리에서 수백 번도 더 들었을 “민방위 끝나면 정말 청춘이 끝난 거 같다”는 그 말이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말을 나도 할 때쯤 이렇게 홀로 생활을 하고 있을지는 몰랐다.
아니 한 때는 그 홀로의 삶을 바랐고 한 때 바라지 않았기에 지금은 그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이 망연하고 막막하고 허전하고 또 흡족하고 얽매이지 않고 홀가분한 감정을 비단 나만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라 믿는다.
그 감정들에 공감하는 이들이 과거보다는 늘어나고 있다. 1인가구, 독신, 싱글. 비혼..이렇게 명명된 익명의 집단이지만 그 안엔 분명 각각의 개별적인 삶과 사연과 성실이 있을지니 그 중 누군가 이 글을 읽으신다면 혹시나 모를 인연에 대한 기대와 삶에 대한 호기심이 늘 함께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