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4학년 무렵 국문과의 전공과목인 의미론 수업을 들었다. 그 교수님의 수업 내용은 딱히 기억나지 않지만 교수님께서 해주신 이야기 하나가 아직도 생생하다.
교수님께서 무척 사랑하는 조카가 있었는데(친자식도 아닌!) 어느 날 어린 조카가 교수님의 컴퓨터를 잘못 건드려 작성하던 논문 한 편을 하드에서 날려버렸다는 것이다.
몇 달간 잠도 못 자고 이제 완성을 앞둔 논문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교수님은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분노와 짜증을 느끼셨단다. 하지만 막상 네 댓살 된 조카가 정말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며 잘못을 비는 데 차마 그 조카를 나무라지 못했다고 한다.
인상적인 내용은 그 다음이었다. 만약 자신의 아내가 그런 실수를 저질렀다면 과연 수월히 넘어갈 수 있었을까? 되물었는데 그러지 못했을 거란다.
그 이후에 교수님은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아마도 그런 대책 없는 내리사랑이라는 게 새삼스러웠다는 말을 덧붙였다
교수님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부부 사이에는 정작 그 사랑을 놓고 셈법이 있고 밀당이 있지만 자식 앞에서는 그런 게 무기력하다고 고백하셨다.
하여 자식을 낳고 키우는 게 인생을 달리 보는 큰 계기가 된다며 그래서 결혼을 마냥 후회하지만은 않는다고 담담히 말씀하셨다. 종교적인 결단을 제외하고 다른 인생을 살 수 있는 합법적인 기회는 결혼을 해 아이를 낳는 것이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농반진반 강조했다. 의미론 수업의 마지막 날 인생의 의미에 대한 선배로서의 조언이라고 하셨다.
혼자 사는 삶에서 큰 갈등 하나가 정작 결혼보다는 양육인 경우를 종종 봤다.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부담, 혹은 내 피붙이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 내지 본능. 또 결혼 후에도 기혼자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자식 때문에 살지. 그 말은 사실 우리 부모님들도 누군가에게는 적잖이 하셨던 말씀이었을 것이다.
결혼한 지인들은 아이의 탄생이나 혹은 아이를 갖기 위해, 아니면 아이를 갖지 않기로 결정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세계를 만나고 자신들의 사랑이 여러 시험에 든다고 털어놓는다.
누군가를 사랑했지만, 사랑하겠지만 내 몸에서 나온 혈육을 사랑할 기회가 있을지 없을지 지금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예측 불가능성은 현재의 불안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막연한 기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인생이 내 앞에 펼쳐지더라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하나 있다.
세상에는 자식을 낳은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으며 둘의 인생 그 자체는 자식의 여부로 차등을 매길 수 없는 각자의 의미가 있고 희로애락이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