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독신 공감

독신으로 산다는 것 41
'감정의 순도는 낮아져도'

by 월영

산행에서 가장 기분이 좋은 순간은 고운 능선을 걸을 때다. 하염없는 능선을 크게 숨차지 않게 오르락내리락 하며 마냥 앞으로 나아갈 때. 그 길이 끝이 나지 않기를 바란 적도 많았다.

이제 미혼의 마흔이 되어 돌이켜 보건데 지금처럼 순탄한 시기는 없었다. 일단 주거가 최장 기간 안정됐다. 이 집에 이사 오기 전까지 따지고 보니 평생 최소 1년 반마다 이사를 다녔다. 직장을 잡은 이후만 해도 8번 집을 옮겼다. 그런데 2011년 이후 지금까지 줄곧 이 집에서 살고 있다. 한 집에서 5년 이상 산 게 생애 처음이다. 이사에 대한 적잖은 트라우마가 남아 집에 대해 다소 과하게 애착을 보인다. 게다가 내 돈 벌어 산 첫 집이니 더욱 더하다.

직장의 업무 역시 십여년 하다보니 요령이면 요령이고 능력이라면 능력이 늘었다. 몇 년 전이면 하루 종일 걸렸을 일을 이제는 마음 먹으면 반나절이면 처리한다. 연차가 올라가면서 생기는 책임감은 부담스럽지만 그 부담을 감내하는 것이 전처럼 과도하지 않다. 업종 자체의 미래는 불안하고 갈수록 어두워짐에도 아직 누군가는 선망하는 직종. 그리고 그 직종이 주는 사회적 평판이나 인정, 혹은 소소한 기득권과 가끔씩의 보람도 나쁘지 않다.


인간관계에서 딱히 힘든 것도 없다. 서른 후반에 시작한 연애가 깨지면서 내상을 크게 입긴 했어도 전처럼 극적이고 청승맞은 심리가 오래가진 않았다. 다만 지그시 오랫동안 묵묵하게 아플 뿐. 그 고통도 가끔의 숙취처럼 지나고 나면 또 사라진다. 부모님 건강하시고 친구들 무탈하고 딱히 나를 직접적으로 피곤하게 하는 사람도 없다. 애닮픈, 설렌 사람도 없고.

경제적으로도 크게 어렵지 않다. 대출 갚느라 만져보지도 못한 돈이 달마다 빠져나가지만 혼자 사는 이의 여유로움을 찾아 즐기는 편이다. 지난 몇 년간 휴가 때면 서유럽을 일주하고 자전거로 제주를 돌았고 베트남과 홍콩, 마카오를 다녀왔고 스페인 바르셀로나와 일본 오사카, 교토를 찍고 올해는 이탈리아와 그리스를 보고 왔다. 2007년 중고로 첫 차를 산 이후 중고차지만 계속 더 비싼 차를 사왔다. 책도 보고 싶은 건 다 샀고 자전거도 로드, 접이형, 마실용 세 대나 마련했다. 등산 장비만 해도 얼추 몇 백만원 이상 쏟아 부었던 듯 싶다. 먹고 싶은 것도 잘 사서 먹는다.

즉 지금의 내 인생은 평탄한 능선길처럼 무난하게 진행되고 있다. 악에 받쳐 무엇을 하지 않아도 유지가 되고 있으니 실은 감사하고 고맙고 감읍할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멍하니 홀로 궁리하는 시간은 더 길어졌다. 분명 10년 전에 비해 내 인생은 여러 모로 안정적이고 풍요로워졌다. 그런데도 가끔은 남과 비교해 괜히 우울하거나 혹은 우쭐해한다.

예전에는 감정의 순도가 높았다. 좋으면 좋았고 싫으면 싫었다. 부끄러우면 부끄러웠다. 그런데 요즘은 거기서부터 달라진 듯하다. 감정은 점점 혼탁해져 순도를 잴 수가 없고 게다가 생각의 일관성도 없어지고 있다. 그런 분열과 분화가 현실의 이전투구를 견디어 낼 수 있는 방어기제인건지 아니면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닌 헛된 것들을 추구하는데 따른 부작용인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능선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과 그 능선의 끝에는 오르막이나 내릭막이 있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 놓여있건 간에 지금은 그저 그 길이 완만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완만한 길을 걸어야 호흡이 가쁘지 않고 주변의 온간 풍경들을 만끽할 수 있다. 산행의 첫 번째는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산길을 걸으며 온갖 것들의 순리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임을 이제는 좀 알 것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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