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독신 공감

독신으로 산다는 것 34
'적적하지 않은 고요'

독신공감

by 월영

차갑지만 상쾌했다. 몸은 밤새 들숨과 날숨만으로도 가벼워졌다. '여섯 시는 넘었겠지' 하며 손목시계를 봤다. 시간은 아직 오전 5시 안이었다. 집이었으면 다시 비몽사몽 할 시간. 그러나 정신이 너무 투명해져 누워있기가 머쓱해했다. 침낭 안에서 뭉그적거리다 일어났다. 텐트를 열고 나가보니 서서히 사위가 환해지는 중.


마침 도봉산 능선 너머로 뜨는 해와 서해가 뿜어낸 운무 아래로 숨어버리는 보름달을 거의 동시에 볼 수 있었다. 그 순간을 이리저리 카메라에 담았다. 일출과 몰월을 함께 보는 호사를 언제 또 누리려나. 내 생존과는 무관하게 수십억 년을 반복했을 태양과 달의 운행. 잠깐 현기증도 일었다. 무릇 내 삶도 이처럼 우주의 먼지의 먼지조차 아니 될 순간에 존재하는 잠시이자 찰나일 텐데. 괜한 정서적 아득함에 심호흡을 크게 했다.


'아침 먹고 자리를 정리할까?' 하다가 일찍 집에 가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에 물 한 모금 마시고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다시 하룻밤 잠자리를 배낭 안에 집어넣었고 하산할 채비를 했다. 시계를 보니 오전 여섯 시 사십 분. 평소 같으면 겨우 잠자리에서 일어나 더 자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르며 출근을 준비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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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을 왼편에 놓고 하산했다. 지난밤에 올라올 때는 달빛이 밝아 랜턴을 켜지 않을 정도로 환했다. 달빛 찬 능선을 걸으며 산 그림자와 내 그림자가 어울 거리고 출렁거렸다. 황홀하다는 말이 부족했던 전날 밤. 술이 안주였고 달빛이 술이었다. 만월에 만취해 넋놓았던 순간이 생각나 부끄러웠다. 그 부끄러움이 전이되었던지 산에 진달래가 지천이었다. 그 분홍빛 부끄러움이 만연한 길을 허허거리며 내려왔다. 길이 저 멀러 한강까지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진달래 꽃바람에 전했다.


오후에는 미루고 미뤘던 책장 정리를 했다. 책장 하나 더 산 것에 맞춰 종류별로 책을 재배치하고 여러 잡동사니들을 선별해 정리하고 버렸다. 동네 도서관에 기증할 책들을 골라냈다. 어차히 읽지 않을 책들일 텐데 골라내는 일이 이외로 수월하지 않았다. '혹시나 나중에 찾아볼 책일 수도 있을 텐데'라는 망설임을 끊어내고 몇 박스 분량을 추렸다.


어느덧 휴일 하루가 저문다. 새벽부터 산 꼭대기에서 찬바람 맞으며 일어났다. 이후 다시 어둠이 사방을 채울 때까지 종일 맑을 정신으로 있었다. 덕분에 한동안 미뤘던 일들을 처리했다. 출근했다면 점심 먹고 책상에서 잠시나마 졸았으련만 오늘은 잠시도 내 정신을 어디에다 방임하지 않았다.


아마 달빛에 취해 산에 올라가 하룻밤 풍찬노숙을 하면서도 오래간만에 깊은 잠을 잤기 때문일 것이다. 새벽녘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을 때 모처럼 숙면을 취해 몸과 마음이 모두 원상태로 재생했다는 느낌이 신선하고 또 신선했다. 그 맛에 무거운 배낭을 이고 산속에 홀로 들어가 이른바 '비박'을 하고 오는 것일 게다.


돌이켜 보니 오늘. 홀로 있었으나 풍족했다. 그 하루 안에는 누가 시켜서, 혹은 누구에 대한 의무로, 누구를 위해 내키지 않은 일을 한 적이 없었다. 능동형으로, 자발적으로 나를 위해 온전히 살았다는 작은 자부심으로 혼자 사는 작은 집이 가득 찼다. 적적하지 않은 고요가 조용히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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