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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영 May 26. 2017

새벽 3시의 남과 여

짧은 소설

"선배는 상처에 매몰되어 있는거 같아.” 

침묵이 흘렀다. 새벽 3시. 백열등 몇 개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허름한 술집 안에서는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도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색함이 메마를 무렵. 남자는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야기가 아니라 노랫말이었다. 점점더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시간인 줄 알았는데. 나지막하게 따라부르는 노래에 여자도 음율을 맞췄다. 지난 몇 년 간 처음이었다. 어색하지 않았다. 같이 노래를 부르는 것은 그들 만남의 일상 중 하나였다. 
 
노래가 끝났다. 또 다른 김광석의 노래가 흘렀다. 남자는 병에 남은 맥주를 다 마셨다. 여자는 담배를 피워물었다. 한 순간 같은 1분이 흘렀다. “상처를 받은 사람이 왜 상처에 매몰되는 줄 아냐?" 남자는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김광석의 노래 '사랑했지만'의 후렴부가 나올때 여자에게 물었다. 술보다 담배연기에 취해있던 그녀는 다시 잠에 취한 듯 눈 꺼플을 깜박이며 “몰라” 짧게 답했다. 

 
“...처음 상처를 받았을 때 그 상처를 아무에게도 말 할 수가 없기 때문이야. 주변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상처지.” 여자는 맥주를 한 병 더 시켰다. 남자의 빈병과 부딪힐 때 힘을 주었다. 쨍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으로 큰 상처인데, 혼자 감당할 수 밖에 없더라.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했지. 근데 내 상처가 또 남에게도 상처가 될까 두렵더라. 결국 위로해 주는 사람은 내 자신이 되더라.” 
 
스피커가 조용해졌다. '그렁그렁' 여자는 남자의 흔들리는 눈빛을 처음 보았다. 빈 병 대신 물잔을 들이키며 남자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바보야? 왜 그렇게 살아” 여자는 다시 맥주병을 권했다. 남자는 피식 웃으며 “취했다 너”라고 말했다. “그렇게 상처를 이겨나가다보면 스스로 대견한거야. 혼자서 그렇게 커다란 상처를 이겨냈구나. 그래서 힘들때마다 그 기억을 되돌리며 또 스스로 격려를 하지. 그 상처에 비해 작은 것에 불과하다고.” 
 
여자는 남자가 하는 말을 더 들었다. 길지 않은 이야기 였으나 모두 기억하지 못했다. 술집에서 나온 시간은 새벽 3시반. 길거리 횡단보도 앞에서 여자는 처음 남자의 팔장을 꼈다. 그리고 건너편으로 달렸다. 남자는 당황한 듯 “미쳤냐 너” 하면서도 여자의 빠른 발걸음에 보조를 맞췄다. 길 옆에는 택시들이 줄지어 있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골목안 불그스름한 모텔 간판이 생존신호를 보내듯 깜빡이고 있었다. 
 
남자는 차가운 새벽 바람이 고마웠다. 팔장을 풀고 택시 앞으로 갔다. 
“타라 빨리” 
“선배부터 타. 오늘은 선배 타는거 보고 갈래” 실랑이가 벌어졌다. 남자는 순간 여자를 안아주고 싶었다. 서둘러 택시에 올라탔다. 그리고 여자를 봤다. 여자는 예전처럼 손을 흔들지 않았다. 택시기사에게 행선지를 말했다. 택시가 떠나 큰 길로 접어들때까지 남자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여자는 남자의 목소리가 메이는 여자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선배였다. 남자는 아직도 그 선배의 이름을 애틋한 문장들의 주어로 가지고 있었다. 여자는 둘 사이에 일어난 일을 알고 있었다. 남자의 입을 통해서였다. 여자와 선배 사이 연락은 끊긴지 오래. 남자는 그녀를 만난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애인 이야기를 듣는다고 했다. 서로의 상처를 알기 때문에 만난다고 남자는 자신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는 휴대폰을 꺼냈다. 수화버튼을 눌렀다 말았다 반복했다. 여자도 택시를 탔다. 빈 거리의 택시는 저돌적으로 달렸다. 어느새 집 앞에 와있었다. 휴대폰을 핸드백에 집어넣는 순간. 휴대폰 액정이 반짝 거렸다. 잘 들어갔는지 안부를 묻는 남자의 문자 메시지였다. 여자는 수화기에 '잘 자요' 속삭였다. 
 
집에 들어가기 직전 남자는 휴대폰을 꺼냈다. '선배 반가웠어요'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남자는 길 옆의 택시와 길 앞의 모텔 중간에 섰던 그 순간을 기억했다. 남자는 헤어질 때마다 의례적으로 나누었던 악수를 걸렀다. 여자의 손을 잡았다면. 후회인지 혹은 다행인지. 남자는 애써 구분하지 않기로 했다. 


새벽 4시. 여자와 남자는 각각의 방에서 휴대폰을 머리 맡에 두고 잠이 들었다. 그날 밤. 서로의 꿈에 스미었던 사실을 둘은 끝내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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