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로, 언젠가 '우리'의 자리가 되길
나의 자리는 어디야
열여섯 살의 봄날, 주인공 ‘효신’은 교통사고로 엄마를 잃었다.
그리고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알려주지 않는 아빠에 의해 곧장 이모 ‘진희’에게 맡겨진다.
“효신아, 실은 이모가 지금 동거하는 친구가 있어.”(p.18)
이모네 집으로 가는 길, 서러움과 외로움, 막막함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에 효신은 눈물을 삼켰다. 공고했던 무리와 분리되는 상황이 자신의 존재와 가치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졌으나 효신이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모네 집에 원래 본인의 자리가 있었던 게 아님을, 어떤 요구와 배려로 마련된 영역이라는 것임을 느끼고 자꾸만 방의 어둠 속으로 숨으려 한다. 이모가 말한 친구는 여자였다. 이모‘들’과의 동거는 이런 불편함과 어색함에서 시작된다.
당신들의 비밀에 나도 동참할래
비밀은 말하고 싶다는 의지와 말할 수 없는 현실, 대비되는 성질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들켜서는 안 되는 비밀, 나만 알게 된 누군가의 비밀, 공유하는 비밀 등은 갈등의 흔한 클리셰이다. 물론 위의 예시가 비밀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사람의 수만큼 비밀에 대한 반응 또한 다양할 테니. 그러나 말하고 싶다는 감정은 이해와 긍정의 기대감을 내포하고 있으며, 말할 수 없다는 결론은 부정과 체념, 두려움과 걱정을 동반한다.
<사랑하는 이모들>은 이런 비밀의 양면성을 조명한다. 이모의 동거인 ‘주영’은 체념하거나 포기한 듯, 효신에게 이모와 자신이 ‘연인’ 임을 밝힌다. 어색한 상태로 이모들을 멀리 하던 중, 효신은 이모를 두고 아빠가 엄마에게 했던 말을 기억해낸다.
“그런 사람들 존중해야 하는 거 아는데, 솔직히 불편해. 나한테 강요하지 마.”(p.105)
동성 간의 사랑은 당혹스러웠으나, 아빠의 몰이해와 배척에 본인이 겹쳐 보인다는 사실에 더 큰 부끄러움을 느낀다. 다만 그들의 관계에 대한 생각의 변화를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 그 비밀로 인하여 당신들에게서 멀어질 생각은 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어울렸다. 그들의 비밀을 그저 품은 것이다.
굳이 설득하지 않아도 되는 비밀, 동참하지 않지만 배척하지도 않는 비밀, 이미 그들 사이 공공연한 사실이 된 비밀은 일종의 유대를 형성했다.
사실이 된 비밀의 가벼움과 편안함을 아니
“이모들의 삶이 궁금했다. 바라고 선망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점점 부끄러워졌다.”(p.167)
이모들의 비밀을 확인한 효신이 동경과 수치를 느낀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며 역할을 분배했다. 그 모습이 효신의 눈에 비치길, 어른의 완성형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비밀의 절망과 환희를 아는 성숙한 어른으로 보여 부러운 한편으로 그들에게 영원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본인의 처지를 새삼 직시하게 됐던 게 아닐까. 효신은 이모들과 함께 보낸 시간을 통해 성장했다. 칭얼거리며 이해만을 바라던 아이에서 벗어나, 본인을 데리러 온 차 안에서 아빠에게 대화를 요구하는 장면은 효신이 스스로의 ‘자리’를 만들 줄 아는 어른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다시 비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비밀이란 결국 혼자만의 꿍꿍이다. 무릇 성장은 적당한 외부 자극과 동반되는 다양한 경험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비밀은 태생적으로 성장의 한계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효신은 이들의 모습에서 비밀의 그림자와 성장의 양분을 유추한 게 아닐까. 어떻게 비밀의 그림자를 짊어졌는지 궁금해하면서 그 어둠을 성장의 양분으로 만든 삶을 선망하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이모들>을 ‘가족’이라는 개념의 확장을 모색하는 만화적 시도로 해석하기보다는 비밀을 감추고 드러내며, 받아들이고 또 배척하는 군상에 대한 회고록이라 정의하고 싶다. 자연스러움에 속하지 않는 성적 지향(비밀)에 대하여 다루면서도 자연스러움(성장)을 말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모들>은 낯선 타인에게 비밀을 드러내 본 경험이 있는지, 감추고만 있었는지, 혹은 타인의 비밀을 목도하고 어떤 태도, 그리고 어떤 표정으로 지냈는지 자연스레 묻는다. 그리고 다양한 삶에 대한 여러 태도들, 그리고 비밀을 공유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자연스럽게 삶을 이어나가는 이들의 모습을 넌지시 보여준다. 그저 알리는 것이다. 이런 비밀이 있다고, 이런 성장도 있더라고. 자신의 자리란 이렇게 만드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