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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득원 Nov 04. 2024

<아나이스 닌 : 거짓의 바다에서>:

“거짓의 바다”를 건너는 과정

부캐(부캐릭터), 혹은 멀티 페르소나는 이미 사회적 현상의 일부로 명명된 지 오래이다. 부캐는 본캐(본래의 캐릭터)와 구별되는 부차적인 캐릭터를 의미하는 말이다. 온라인 게임 분야에서 대두되기 시작한 이 개념은 각종 방송을 망라하면서 대중들에게도 친숙한 개념이 되었다. 평소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질 수 있다는 것, 본인 안에 한 가지의 면모만 있는 게 아님을 인정하고 수많은 ‘나’를 전시하는 작업은 흥미롭다. 다만 한정된 시간의 굴레에서 다중적인 정체성을 구가하는 것이니 위험성 또한 수반하고 있다. 복합적인 나를 들여다보는 일은 필연적으로 모순을 생성한다. 일기는 모순을 효과적으로 들여다보게 하는 수단이다.


레오니 비쇼프, 『아나이스 닌: 거짓의 바다에서』, 바람북스, 2022.


그래픽노블 <아나이스 닌 : 거짓의 바다에서>는 14살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사후 150여 권의 넘는 일기장을 남긴 실존 인물, ‘아나이스 닌’이라는 예술가의 이야기이자, 다양한 정체성을 인정하고 온갖 사랑을 탐닉하여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이미지로 소비되었던 여성의 고백이다. 작가는 색연필로 그려낸 고혹적인 선, 풍성하고 세심한 연출로 이런 아나이스의 ‘순간(1932년)’을 그려냈다.


작품의 서두, 아나이스는 자신이 두 권의 일기를 쓰고 있음을 은밀하게 밝힌다. 하나의 일기는 타인에게 “몽상이라고 말한 것”, “상상”을 글로 구체화하는 용도로 쓴다. 즉 비밀의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한 일기이며, 또 다른 일기는 순수함의 이상을 지키기 위한 일기이다. 타인에게 몇 구절씩 읽어줄 수도 있는 안전함을 전제로 한다. 아나이스는 남편 휴고 길러와의 안전하고 다소 지루한 사랑, 헨리 밀러와의 예술적이며 격동적인 사랑, 어린 시절의 비뚤어진 동경과 환상으로 점철된 아버지와의 사랑 등을 통해 영혼의 진일보를 꿈꿨다. 순결, 관계의 사회적 책임과 도의는 본질을 찾기 위한 여정의 장애물에 불과하였다. 의사, 댄스 교사, 선생님들과의 교감은 그저 내면의 조력자를 찾기 위한 과정의 일부였던 셈이다.     


레오니 비쇼프, 『아나이스 닌: 거짓의 바다에서』, 바람북스, 2022.

환경과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을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쏟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꾸미고 감출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생존을 위함이기도 하다. 먹이사슬의 상위에 자리한 이 앞에서 초라해지고, 하위에 놓인 이 앞에서 매서워지는 생존의 본능이다. 생존과 직결되는 거짓을 단지 ‘거짓’이라고 폄하할 수 있는 완전무결함이 있을까. 아나이스는 상상이라는 허울과 ‘거짓의 바다’라는 역설적 표현을 수단으로 내세웠다. 아나이스의 입장이 절박하게 여겨지는 건 그 거짓이 유희가 아닌 ‘생존의 수단’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나이스는 “삶만으로는 상상을 충족시킬 수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온 힘을 다해 살 것"이라는 아나이스의 말은 솔직한 다짐이었을 테다. 아나이스는 언제 어디서나 한 가지 역할만을 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의 막연함과 부질없음을 이해하고, 본질에 귀 기울이겠다는 의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부캐, 혹은 멀티 페르소나의 현현 또한 마찬가지다. 이는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나아질 자신이 없다는 패배감의 말로가 아니다. 부차적인 정체성을 인정함으로써 더 나은 '나'의 집합을 만들겠다는 포부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태초의 ‘나’에게서 발견한 모순을 보완하여 또 다른 ‘나’를 만들고 가꾸고 버리는 일련의 과정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경험이므로, 무수한 ‘나’의 발생과 성행은 역사적 맥락을 품고 있다. 한 명의 여성이 가지게 되는 호칭과 역할은 셀 수 없이 다양하다, 이름부터 아가에서 처녀, 엄마와 할머니 등의 대명사까지, 또 시대에 따라 남편의 성, 지명, 직업으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이다. 남성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내부의 선택이 외부의 결정과 무관할 수 있을까.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무수한 역할을 획득하고 잃기를 반복한다. 아나이스에게 일기란 갈팡질팡하는 스스로를 인정하고 분류하는 체계였다. 모순의 발생은 필연이었으나 모순의 집합이 곧 아나이스의 정체성이었다. 그렇기에 그 모든 과정이 의미로 남았다.


레오니 비쇼프, 『아나이스 닌: 거짓의 바다에서』, 바람북스, 2022.



* 본 글은 만화규장각 > 웹진 > 만화리뷰에 수록되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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