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림 스타일을 찾아서
3년 만에 해외 여행길이 열려 모처럼 한 달 반의 긴 휴가가 생기고, 여러 가지 준비를 하면서 덩달아 그림 그릴 여유도 생겼다. 여행지에서 그릴 그림 도구들을 챙기며 그림 연습을 한다는 핑계로 일전에 ‘어반 스케치’ 매거진에 소개한 드로잉 노트에 이런저런 시도를 하고 있다.
역시 내가 즐겨 그리는 그림은 인물 특히 인체다. 한 발을 내딛으며 발랄하게 걸어가는 모델 사진을 선정해 그저 보이는 대로 따라 그리는 컨투어 드로잉을 적용했다. 컨투어 드로잉은 그림 그리는 능력을 빨리 키우는 방법이기도 해서 내 어반 스케치 수업 과정에도 넣었다. 다만 여기선 연필로 그리되 전체 뼈대나 근육을 먼저 그리지 않았다는 거다. 연필 선 위에 방수 잉크가 든 만년필로 선을 다시 죽죽 긋고 수채물감으로 색을 올렸다. 며칠 안 남은 여행에 대한 설렘이 가득 든 그림이라 아주 오랜만에 내 카톡 프사로 바꿨다.
오른쪽엔 한 달 전에 남편이랑 같이 간 ‘다비드 자맹’의 전시회 티켓을 붙이고 그의 그림을 하나 따라 그려 넣었다. 모방이라 자맹의 트레이드 마크인 턱 밑 점은 찍지 않았다. 현대 미술에서 인물을 주제로 한 구상화는 아주 드물어, 개막 전부터 별러 얼리 버드로 예매를 한 거다. 내 짤막한 감상평 대로 그의 자유로운 붓터치와 강렬한 색채에 반해 버렸다.
본격적으로 내 그림 스타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모델은 내가 애정하는 배우 티모시 샬라메를 택했다. 모델이 유명인인 경우 닮게 그려야 한다는 모종의 압박이 있지만 이젠 개의치 않기로 했다. 닮게 그려지면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안 닮으면 어떠랴, 그릴 때 즐거우면 되는 것을… 아무튼 이번 그림도 전체 뼈대나 근육을 먼저 그리지 않고 눈으로 이곳저곳을 비교하며 연필로 전체 윤곽선을 그린 후 드로잉 펜으로 선을 다시 그었다. 두 그림에서 차이가 있다면 색을 칠하는 방법이다. 왼쪽은 하이라이트를 의식했고 오른쪽은 색채의 밝기만 구별해 칠해서 애니메이션 혹은 일러스트 느낌이 든다. 그림 사이즈가 작아 두 스타일 모두 나쁘지 않다.
하지만 늘 균형 잡힌 인체를 그려온 탓인지 어반 스케치 풍의 자유로운 선으로 그릴 땐 그간 애써 쌓아 온 인체 드로잉 실력이 사라져 버릴까봐 불안하니 A4 사이즈 드로잉북에 제대로 그렸다. HB 연필로 흐리게 뼈대와 근육의 위치를 잡고 진한 연필(4B) 대신 드로잉 펜으로 선을 긋고 명암을 표현했다. 오른쪽 그림을 그리고 나선 마치 만화 같이 그려져 적잖이 실망했다.
그럼 만화 같은 내 그림은 과연 어떤 느낌일까 싶어 따라 그린 그림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삽화 속 하얀 토끼다. 19세기 영국의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카투니스트인 ‘존 테니얼 (John Tenniel 1820-1914)’이 그린 그림들은 지금 봐도 모두 기상천외하다. 팀 버튼이 각색해 만든 동명의 영화에 붉은 여왕으로 출연한 헬레나 본햄 카터는 당시 팀 버튼의 연인이기도 해선지 무섭기보다 너무 귀엽게 나와 내 남편이 제일 좋아했다. 이 그림을 그린 날, 디즈니 플러스로 영화를 다시 찾아봤다…
책 삽화 속 흰 토끼와 영화 속 붉은 여왕을 저리 배치해 그려보니 서로 그럴듯해 보여 혼자 흡족해했다.
이참에 핀터레스트에 찜해 놨던 멋진 일러스트도 따라 그렸다. 작품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니 나도 뮌헨의 노이에 피나코텍에서 본 멋진 <넵투누스의 말>을 그린 유명 삽화가 ‘월터 크레인’의 작품이었다는 걸 알고 뿌듯해했다. 이런 게 명화 따라 그리기의 묘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