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슬럼프가 놀러 왔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이 친구가 예전엔 너무 미웠었는데 이젠 내 숙명적인 벗이거니 한다. 뭔가에 너무 열중한 탓이니까... 오르세 그림 따라 그리기는 그래서 잠시 휴업 중이다. 그래도 그간 그린 그림들에 대해 하고픈 말이 많이 있어 글쓰기 자료로 일단 남겨놓았다.
따라 그리며 내가 깨달은 건, 역시 나는 인체를 그릴 때 흥이 난다는 거다. 아무래도 오르세 미술관은 인상주의 위주라 초반 아카데미 고전주의 작품까진 신나게 그리다 인상주의로 접어드니 급격히 기운이 빠진 듯하다. 나중에라도 조각품들을 따라 그리며 인체 드로잉 실력을 심화시킬까 생각만 했는데 이제 그걸 실현시킬 때가 온 것이리라...
시작할 스케치북은 하네뮬레 양장 노트로 정했는데, 평방 무게가 190g이라서 가벼운 수채화가 가능하다. 물감은 비싸기로 소문난 다니엘 스미스로, 우선 1차색과 2차색만 구비했다. 수시로 꺼내 쓰려고 작은 알토이즈 캔디 통에 짜넣었다.
스케치북의 첫 페이지는 색상환으로 채웠다. 수채화용 종이가 아니라 색이 어떻게 칠해질까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1차색인 삼원색으로 조색을 하니 색이 맑았다. 역시 비싼 만큼 한다 싶었다. 1, 2차색으로 만든 3차색도 마음에 들었다.
핀터레스트에서 찾은 귀여운 천사 조각상 사진을 보며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종이는 텍스처 없이 맨질맨질하지만,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 참 좋았다.
전체를 덩어리로 잡은 후 균형을 살펴보며 세부로 들어갔다.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근육이 울퉁불퉁하지 않게 주의하며 스케치를 마친 후, 명암 구분을 했다.
연필 소묘하듯 어두운 부분을 먼저 칠한다. 색을 칠해보니 종이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손과 발에 잡힌 포동포동한 주름 표현은 아쉽지만, 천사의 왼쪽 다리 부분에 드리운 반사된 그림자 느낌이 좋았다.
무채색의 조색은 1차색인 파란색(프렌치 울트라마린)과 2차색인 오렌지(퀴나크리돈 번트 오렌지)로 했는데, 색이 예쁘고 다양하게 나와 재미있었다. 수채화용 종이가 아니라서 번지기 표현이 덜 되지만, 드로잉을 중점으로 하기에 제격인 스케치북이다.
뭐가 됐든 또 이렇게 내 그림을 그려나가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