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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gevora Feb 17. 2020

나의 커피 유목민 연대기

꿈의 커피메이커를 찾아서.

 나의 자칭 커피 애호가 입문은 언제부터였을까?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내 동생의 증언에 의하면 국민학교 저학년 때부터 나는 어머니가 외출하시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주전자를 불에 올리고 인스턴트커피와  개미가 한두마리씩 빠져있는 설탕통과 동서 프리마를 꺼내는 시건방을 떨었었다고 한다.

 아마도 명절에 친척 어른들이 식후로 드시는 황금비율 연갈색 액체를 한 두 모금씩 얻어마시다가 맛이 들린 것으로 사료된다.

 고등학생 때 울 엄니께서는 학교에서 졸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라면서 아예 도시락과 함께 황금비율 연갈색 드링크를 마호병 가득 담아주실 정도였으니 나의 카페인 의존증은 비교적 일찍 시작되었던 것 같다.

 

 주민등록증이 나올즈음, 인스턴트 커피가 질려갈 무렵 원두커피의 매력을 알게되었다.

특히나 식후에 마시는 블랙커피는 평소 인스턴트커피에서 느끼지 못했던 개운함을 선사했다. 기름지고 무거운 식사 후에는 크림이나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원두커피를 한 잔 마셔줘야 깔끔하게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달달한 케이크 한쪽과 곁들여 마시는 블랙커피는 케이크의 엄청난 칼로리를 없애주는 착각마저 들었더랬다.   


 이십 년 전쯤이었나? 현 남편인 당시 남자 친구가 무슨무슨 벅스라는 미국에서 유명한 커피전문점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는데 한번 가보자는 것이다. 기대를 안고 간 우리는 벽에 붙어있는 메뉴판을 멍하니서서 쳐다보았다. 그동안 앉아서 보고 능숙하게 주문했던 커피전문점의 메뉴판보다 훨씬 많은 종류의 생소한 이름의 커피들이 캐셔 뒤의 벽면에 붙어서 나열되어 있었다.


 남자 친구는 자기는 잘 모르니 커피에 대해 일가견이 있다고 믿어온 여자 친구에게 주문을 해달라고 했고 나는 당황하지 않고 어디서 들어본 말인데 실제로 마셔본 적은 없는 에스프레소를 세련된 척하며 주문했다. 나름 커피 애호가라고 자부하던 나는 예상과는 달리 앙증맞은 컵에 담겨 나온 쓰디쓴 진액을 창피함을 무릅쓰고 큰 컵에 옮겨 담고는 셀프서비스 카운터에서 한도 끝도 없이 크림과 설탕을 들이부어 '이제 좀 마실만해진' 커피를 남자 친구에게 건네주었더랬다. 그리고 한동안 그곳에 가지 않았다.  




 이른바 블랙커피와 아메리카노의 그 작고도 깊은 차이를 알기 전까지는 나의 커피취향은 잡식성이었다.  

편의점 온장고에 있던 레쓰비 같은 캔커피로 손 시린 겨울을 이겨냈으며, 심심한데 주머니에 동전이 있으면 하릴없이 자판기 커피를 빼 마시고, 밥 먹고 나서는 블랙커피, 배고플 땐 라테, 미장원에서는 잡지를 보며 믹스커피를 마시는 등과 같이 TPO에 맞게 닥치는 대로 가리지 않고 마셔댔다.

 

 그런데 어디서 였을까?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잔 위로 황금색 거품이 얹어져 있던 그 고급진 맛의 커피는 그동안 내가 마시던 이른바 블랙커피 또는 원두커피가 아니었다. 부드러운 그 거품에는 씁쓸함과 고소함과 약간의 신맛이 어우러져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신기루처럼 없어지기에 그 찰나를 아쉬워 뽑아져 나오자마나 나는 얄밉게도 황금색 거품부터 홀짝 거렸다.  


 물욕 많던 삼십 대 초반, 나의 위시리스트에는 당시 한창 인기몰이 중이었던 발렌시아가 모터백, 티파니 은목걸이, 샤넬 귀걸이 그리고 크레마라 불리는 그 황금색 거품이 있었다. 그만큼 크레마는 어른이 된 내가 동경하는 그 무엇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삼만구천구백원짜리 커피메이커에서는 그런 거품이 안 만들어진다는 것은 확실했다. 크레마는 원두를 고압으로 추출할 때 생성되는 커피기름이라고 하는데 남편은 커피를 즐기지도 않는데 오직 나만의 기호식품을 위해 에스프레소 머신을 구입하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분명히 어딘가에 보급형 에스프레소 머신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나는 그 해답을 이태리 민족에게서 찾으려고 했다. 이태리 가정의 부엌에는 어느 집이나 모카포트가 있다는 말을 어디서 주워듣고는 가스레인지 위에서 다룬다는 아날로그적 매력에 끌려 크레마가 추출된다는 부담없는 가격의 모카포트를 장만했다.

 

 그러나 손이 게으른 자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만끽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알루미늄이라는 재질의 특성상 부식이 쉽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무엇보다도 적당한 굵기로 그라인드 한 원두를 적정량을 담아 알맞은 양의 물을 부은 다음 적절한 불 조절을 통해 만들어진 커피의 크레마는 생각보다 너무나 빈약해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서 나는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캠핑장에서 낭만적으로 커피를 만들 상상을 하며 내 부엌이 이태리 가정처럼 보였으면 하는 마음으로 모카포트를 관상용으로 진열해 두었다. 참고로 아직도 캠핑장의 꿈은 못 이루었다.  


 이민을 오고 나니 고독을 핑계로 어째 커피를 더 마시게 되었다.

특히나 비가 많이 오는 계절이 되면 주구장창 뜨거운 커피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찮게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반자동 에프스레소 머신을 단돈 50불에 장만하게 되었다.

한동안 유튜브 영상으로 어줍쟎게 배운 바리스타 흉내를 내면서 아메리카노를 만드는 재미에 푹 빠졌다.


  반자동 머신은 미관상 멋있기도 하고 손잡이를 돌리는 손맛도 좋았는데 문제는 커피가 손맛을 너무 많이 탄다는 것이었다. 원두의 분쇄 정도와 신선도도 커피의 맛을 좌우했지만 원두를 필터에 담아 고르게 레벨링을 하고 약 20KG의 무게를 실어 꾹 눌러주는 템핑 작업을 나 같은 귀챠니스트가 정성껏 할리가 만무했다.

 성공적인 에스프레소 추출 이후에는 필터에 담은 원두가 동그랗게 떡이 되어 있다는데 나의 대충스러운 손놀림 때문인지 '원두 떡'은 다섯 샷에 한번 정도로 좀처럼 보기가 힘들었다. 무엇보다 바리스타 놀이는 내게 사치일 정도로 생활이 바빴다.




 삼십 대 후반에 접어들어 삼십 초반의 위시리스트 중 한 개도 제대로 가진 것이 없다는 마음에 조급해졌다.

다행히도 잇백이나 액세서리 등에 대한 관심은 완전히 사그라든 상태였지만 '크레마가 풍부한 아메리카노'에 대한 열망은 이제는 아예 본능처럼 마음에 새겨져 있었다. 반자동머신까지 겪어본 후 얻은 나의 이상적인 커피머신에 대한 결론은 이랬다.

 

1. 크레마가 풍부하게 나올 것.

2. 사용하는데 귀찮지 않을 것.

3. 뒤처리가 깔끔할 것.

 

 답은 당연히 전자동 에스프레소 머신이다.

버튼 한 번만 누르면 항상 일정한 퀄리티의 커피가 추출되고 가끔씩 스케일링이라고 하는 자가 세척(이것도 버튼만 누르면 됨) 외에는 별도로 씻고 자시고 할 것이 없는 완벽한 선택지이다.

 물론 캡슐형 네스프레소 머신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머신의 가격은 부담이 없더라도 나처럼 하루에도 여러 잔을 마시는 사람은 캡슐 값을 감당해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향인데 기성품 느낌이 나는 캡슐 커피는 맛은 좋지만 묘하게 끌리지가 않는다.


 전자동 에스프레소 머신을 사기 위해 나는 무려 반년을 망설였다. 번번이 차라리 카페에서 사 마시고 말지..... 하면서 마음을 수도 없이 접다가도 생각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아마존에서 리뷰를 읽고 사지도 않을 거면서 어떤 브랜드를 골라야 하나 고민하는 시간을 즐겼다.


 전자동 머신도 브랜드별로 가격차이가 있는데 이미 수년간을 보급형 에스프레소 머신에 '시달린' 나는 한이라도 맺혔는지 이왕 살 거면 제일 좋은 브랜드로 사야겠다는 마음이 있었고 결국 전자동 에스프레소 머신의 끝판왕이라는 스위스 제품을 장만함으로서 십년간의 방황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 이후 수 년동안 내 돈 주고 커피를 사마신 기억이 거의 없다. 웬만한 카페에서 파는 아메리카노는 감흥이 없이 느껴질 퀄리티의 유라 느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주말아침의 까페놀이





 아침 식사 대용으로 방탄 커피를 제조하고 텀블러에 성수와도 같은 아메리카노 두 샷을 담아 출근하면 그 생명수는 일터에서 나를 든든하게 응원해준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뽑아 마시는 아메리카노는 하루 중 가장 여유로운 때의 커피이기에 놓칠 수 없다.  

하루 동안 마시는 커피를 가격으로 환산해도 꽤 될 것이다. 허나 그동안 커피기계값을 뽑았냐 아니냐는 내가 산수가 약해서이기도 하지만 굳이 따지고 싶을 만큼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풍부한 크레마가 주는 소소한 행복감은 돈으로 환산하기가 어렵다. 무려 십 년간의 방황 끝에 만난 이 놈은 새로울 것도 빛날 것도 없는 내 일상을 다독여주는 몇 안 되는 아이템이자 주말 내내 집 밖에 한 발자국도 안 나가도 하나도 아쉽지 않게 해주는 '집순력 강화템'이다. 가끔씩 오는 손님에게 커피를 대접할 때도 황금빛 두터운 크레마가 싸구려 아이키아 유리컵 안에서 당당하게 뿜어져 나온다. 풋내기 젊은 시절에 그렇게 동경하던 황금빛 거품이 어느덧 내 삶 속으로 완전히 들어왔다.


  스위스에서 온 도도한 유라느님은 좀처럼 세일도 하지 않고 잘난 몸값이 계속 오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유라가 혹시라도 못쓸 정도로 고장이라도 나면 나는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아마존에서 또 다른 유라를 검색할 것 같다. 내가 마시는 커피가 주는 만족감은 내가 나이를 먹을수록 증가해왔고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개똥철학과 어쩌면 그것이 내 인생에 대한 만족으로 연결되는 것만 같은 기분 탓일 게다.


 그러나 때로는 고딩시절에 마셨던 커피향은 나는데 주로 프리마맛이 강했던 지금  나이의 울엄마표 커피가 그립다. 또한 노후의 일상은 지금보다 훨씬 여유로와서 가끔은 슬로우 커피의 진수를 맛볼  있다는 정성스런 핸드드립을 시전해볼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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