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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gevora Jul 26. 2021

편집과 상실의 시대

참을성 없는 E(I)NTP의 문화생활

 이번 주말 동안 영화를 한 스무 편 은 본 것 같다.

이 인간은 밥먹고 영화만 봤나 하겠지만 내가 보는 영화는 한 편당 20분 내외면 대강의 줄거리 파악과 약간의 감상평까지도 얻을 수 있는 유튜브 영화 리뷰 채널에서 볼 수 있다.


 '죽기전에  봐야할 레전드 영화'

 영화   사람 없게 해주세요'

같은 제목은 이제는 식상할만치 평범하다.  


' 영화를 보고도 지리지 않는다면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 영상은 6시간  삭제될 예정이니 

지금 빨리 보세요',

'범인 맞추면 아이큐 최소 200'  

등의 인간의 은밀한 심리를 한껏 자극하는 제목과

'ㄷㄷㄷ' '!!!!' '????' 식의 문장부호만이 삽입되어 

잔뜩 호기심을 유발하는 썸네일은 

도저히 클릭을 안 할 수가 없게 만든다.


 유튜브 영화 리뷰를 본다는 것은 원래는 

이미 내가  영화에 대한 감상평을 보고 싶어서,

아니면 관람전 괜챦은 영화를 고르기 위해서라든지 등의 목적이었겠지만,

나는 언제부터인지 [결말포함]이라는 

말머리가 있고 

영화의 엑기스만을 딱딱 뽑아서 

짜임새 있게 편집하고 

맛깔난 나레이션이 곁들여진 

영화리뷰 영상에 중독이 되어 버렸다.


 이를테면, 2019년에 개봉한

미성년'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타짜의 아귀로  알려진 김윤석 배우님의 

 연출 데뷔작으로 화제가 되었던 영화이다.


그때 당시 나는 집에서  영화를 은 후

  정도 보다 말고 도로 꺼버린 기억이 있다.

어둡고 정적인 도입부의 지루함을 

견딜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유튜브에서

이거 보고 소름  돋으면 손에 장을 지짐,

충격결말주의'라는 식의 

잔뜩 호들갑을  썸네일을 보고 

홀린  클릭했더니만 

그 '미성년'이라는 영화를 15분 동안 꽤나 재미있게 압축해 놓은 영상이었다.

 

  영상에는 내가 애초에 지루하다고 느꼈던 

도입부는  3 정도 나오고,

여자 주인공들이 머리 끄댕이를 잡고 싸우는 장면 등을 비롯하여

원래 영화에서 가장 역동적인 부분들이 빠른 화면 전환으로 흘러가며

내 의식의 멱살도 같이 잡고 사정없이 끌고 갔다.


 '아...이 영화가 원래 재밌는 영화였구나'

라는 소감도 잠시, 줄줄이 밑으로 이어지는 추천영상의 썸네일은  한번만 봐달라고 

으악을 지르는  같았다.

그렇게 한번의 클릭을 시작으로 

얼떨결에 두세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그동안 나도 모르게 꽤 많은 영화를 '감상'하게 된다.


한국 멜로의 명작이라 일컬어지는 

‘8월의 크리스마스'

 잔잔함과 밋밋함이 지루해서 

10 이상을 보지 못했더랬는데,

솜씨좋은 유튜버에 의해 만들어진 편집본은 

친절하게도 

'남자는 여자에게 점점 호감이 생기는데,

그러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 여자를 멀리하고....

마지막에 심은하씨가 지은 미소는 .....

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라는 식으로 내게 숟가락으로 밥을 다 떠 먹여준 후 소화까지 시켜줘서

나로 하여금 어디가서 나도 그 영화를 '봤다'고 말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나는 영화    시간에 

꽤나 경제적이고 효율적으로  대여섯편의 영화를

봤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게 된다.



 

 나는 어릴 적부터 영화를 무척 좋아했다.

 아침에 신문이 오면 제일 먼저 TV 편성표에 소개된 간략한 줄거리를 읽고

이번주말에는 MBC의 '주말의 명화'와 KBS '명화 극장' 중 어떤 것을 볼 것인지 고민을 했다.

거기다가 남자 주인공의 더빙을 배한성 성우님이 

맡는다고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영화는  봐야했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토요일밤 9시 뉴스가 끝날 즈음에는 항상 가슴이 두근 거렸다.

온 가족이 과일을 먹으면서 TV 앞에 앉아

언제들어도 질리지 않는 웅장한 인트로 뮤직이 나올 때 즈음에는

앞으로 두시간 동안 만끽할 즐거움에 가슴설레어 

했다.

  

 물론 그 때 본 모든 영화가 재미있었던 것은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닥터 지바고'를 포함 많은 영화를 보다가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잠들어서

"야..방에 들어가서 자"하는 부모님의 말씀에 눈을 떠보면

TV 화면에는 어느새 까만 바탕에 엔딩 크레딧이 

속절없이 올라가고 있는 적도 허다했다.


 하지만 강산이 두어번 바뀐 지금, '영화감상'에 가장 진심이었던 적은 그때였던 것 같다.

이른바 '방송국에서 골라준 영화'에 대한 신뢰,

본방을 놓치면 따로 비디오를 빌려 보지 않는 한 다시 보기 힘들 것이라는 '본방사수의 의지',

더운 여름밤, 거실 TV 앞에 깔린 시원한

대나무 돗자리의 촉감과 

엄마가 깎아다 주신 과일과 

~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선풍기 

하다못해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무거운 눈꺼풀로 애써 줄거리를 따라가려 했던 

노력까지도 

나의 '영화감상'이라는 카테고리에 

모두 포함된 것이었다.



 넷플릭스,유튜브 등을 통해 얼마든지  거리가

 범람하는 시대이다.

 마음껏 골라보는 재미가 있고 감상 

조금이라도 재미가 없으면 언제라도 꺼버리고 

다른 작품으로 갈아탈  있다.

그걸로도 모자라 이제는 

남이  대신 보고 만든 다이제스티브 형식의 

요약본으로 이른바 '영화감상' 하고 있다.


 공포영화를 좋아하지만 감상하면서 '기빨리는 것'은 두려운 나에게 15분 버전은 꽤 좋은 대안이다.

허나 싸이코패스 연쇄살인마 오컬트 빙의가 번갈아 나오는 영화를 예닐곱편을 내리 보다보면

가랑비에 옷젖는  모르듯 기가 잔뜩 빨려 있고 

머리속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잔잔한 음악이 깔리며 남녀 주인공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다소 지루한 부분이 다 쳐 내진 후

---결의 뼈다귀만 남은 멜로물은 

 볼만하다.

그런데 그 줄거리 자체는 어쩜 그렇게 평범하고도 밋밋한 것인지,

불륜커플이라도 등장하지 않으면 정상적인 남녀간의 갈등은 어디 신문기사만도 못하게 보잘것 없다.  


 나는 이제 의문이다.

내가 전처럼 로베트로 베니니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초반에 등장하는

시끌벅적한 호들갑을 어른들의 동화처럼 

유쾌하게 감상할  있을지,


공포영화 ' 아더스'에서 니콜 키드먼의 시선을

따라 시종일관 흐르는 묵직한 불안감을 

견딜  있을지,


모니카 벨루치가 리즈 시절에 출연한 

 빠르망'에서 등장하는 연인들의 

억지스러울 정도의 엇갈림이 멕이는 

고구마  개를 먹고 체하지 않을  있을지,


김윤석 님이 분한 '암수살인'에서 

형사님의 수사가 난항에 부딪쳐 

내적갈등을 겪는 동안 졸지 않을  있을지,


 배경음악, 미장센, 감정선, 상징과 은유..

이밖에 모든 지루함이 거세되어 줄거리만 남아있는,   

2차로 가공된 요약편집본의 인스턴트 식품 같은 맛에 혀가 마비된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인트로 뮤직 이후 끈기있게 광고를 열 댓게 보고 시작했던

그 주말의 명화 방영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영화감상이었노라고 말하고 싶다.  

얼른 화장실 다녀오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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