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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gevora Oct 01. 2021

생계형 STJ가 된 NTP

없는 적성도 만들어 버리기.

 사회생활, 어언 20여년 경력이 되어보니 

나에게 '적성에 맞는 '이라는 것이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인가 싶다.

 

 상기 본인은 문과천민이다보니 대학 졸업 

전공불문자' 뽑는 직종 중에,

대에충 어디다 명함 내밀기 좋고, 대우 나쁘지 않는 그런 곳에 발을 들였다.

 그곳은 보수적인 분위기에 꼼꼼함, 빠릿빠릿함, 말끔한 정리력, 철두철미한 스케쥴링 등(하긴 거의 모든 직업에 요구되는 미덕이겠으나) 이 유난히 요구되는 곳이었다.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NTP 들은 공감하실 것이다.

 종족은 “나는 나무를 보기 보다는 숲을 보는 편이야라는 드립을 치면서,

숲은 커녕, 있지도 않은 정글까지 보는 바람에 정작 이 숲에는 무슨 나무가 있는지조차 못 보는 스타일이다.

 

 또한 모든 성격군 중에 가장 정리정돈에 취약한

 족속일 것이다.

어찌된   눈에는 책상 위에 일주일 전부터 놓여있는 바나나 껍질이 보이지 않는다.

 20 초중반 당시의 나를 아는 지인들은 아마도 

속으로 '저거 얼마 못가서 적성에  맞는다고 때려치겠지'라는 각을 재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찌어찌해서 40 중반이  지금까지도 

금융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요 근래 회사에서 무척 바빴다.


내 기준에 바쁜 것에는 두 가지 양상이 있다.

 첫째는, 그냥 바쁘기만 한 것이다.

별 성과도 없고, 뭐 하길래 바빴냐고 누가 물어보면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런데 늘 시간이 쫒기듯 허둥대고 납기를 지나거나 업무에도 누수가 생긴다.

이럴  이유는   가지이다.

한마디로 일을 못해서 그런 것이다.  

그러면서 바쁘다고 우는 소리를 하면 

나만 우스워지게 된다.


 둘째는 절대적인 업무량이 많아서이다.

 업무량 대비 내게 주어진 물리적인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면 바쁠 수밖에 없는데,

 때는 내가 우는 소리 하지 않아도 

상사가 먼저 알아봐준다.

여기서 성과까지 발생하면 금상첨화이다.


다행히도 최근에 나는 두 번째 양상으로 바빴다.

하지만 첫번째 경우처럼 미련하게 바쁜 적도 많았었는데,  이는 NTP 특유의 이상한 기질도   했던  같다.


업무의 우선순위를 정하지 않은 채 닥치는 대로 일을 하여 납기를 놓치거나,

동료에게 넘겨도 되는 일을 아쉬운 소리 하기 싫어 붙들고 있는 바람에 죽도 밥도 안되게 만들어 놓거나,

지나치게 상사의 눈치를 많이 봐서 질문과 보고의 타이밍을 놓치거나,

사소하다 싶은 일(NTP의 눈에는 대부분 다 사소해 보임) 은 일단 미뤘다가 훗날 큰 일로 만들어 수습하는데 불필요한 시간을 보내면서 바쁜 적이 자주 있었다.


 이런 내가 근 20년을 이 업계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생계형 직장인이라는 타이틀 외에도

맘만 먹으면 특정 타인을 분석해서 둔갑하기를 잘하는, 전우치도 울고  NTP 특유의 변신술 덕이었는데  사람들은  것을 '사회화'라고 일컬을 것이다.


 사회 초년생 시절 상사가 엄청 예뻐라하는 후배가 있었는데, 나는 이 후배의 장점 몇 가지를 '흉내'내어

호랑이 상사의 눈엣가시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 후배는 인사성이 좋고 타인에게 관심의 표현을 잘 하고 (예쁜 그녀는 상사에게 왜 한숨 쉬세요?라고 묻는 귀여움이 있었다. 반면 나는 상사에 내쉬는 한숨소리를 듣지도 못했는데... )

언제나 자발적으로 남들이 하기 싫은 일을 도맡아 하는 모범생이었다.

물론 2000년대 초반의 일이니 요즘 밀레니얼 세대에는 통하지 않는 미덕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후배를 열심히 벤치마킹했던 결과 

매사에 의욕적이고 태도가 좋은 직장인'이라는 

페르소나 하나를 득템해서 이날 이때껏 잘 써먹어왔다.   


 그러던 중 얼마전 나는 위기를 맞았다.

얼굴에 ISTJ라고 써있는 상사 밑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불길한 예감 대로  상사는  땜에 여러번 뒷목을 잡았는데,  중에서도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의 얼굴에서 정말 딥빡을 목격했을 때는 

내가 되도 않는 융통성을 부리면서 

대나무처럼 곧은 규정을 활처럼 구부렸을 때였다.


 조선시대 때, 살인,방화,약탈,강간 보다 더 중형으로 다스렸던 것은 '반역'이었다.

때로는 삼족을 멸하면서까지 씨를 말리고자 했던 

죄성(罪性)이란 것이 무고한 생명을 뺏는 것보다 

고작(?) 기존의 체제를 거스르려하는 시도임이 

아이러니하다.


 현대사회에서 '반역'이란 의외로   닐 지도 모른다.

규정은 그 자체로 완전하지 않아 얼마든지 변형하거나 무시할 수 있다는 발칙한 발상 또한

보수적인 금융업계에서는 반역에 준하는 죄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나는 이런 폐쇄적이고 발전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조직에서는 일할  없숴!"


 하고 일갈하며 사표를 던지는 것은 

드라마에서나   있는 장면이다.


 생활인인 NTP 종자는 또 살 길을 모색해야 했다.

이번 타겟은 바로 저 순도 100% ISTJ 상사였다.

다행히도 그는 엄격하지만 기본적인 인성이 좋은 

자였다.

그는 내게 곧이 곧대로 규정을 지키는 것은 회사에 충성해서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합리적인 설득을 했다.

항상 리스크와의 전쟁을 벌이는 이 곳은 자칫 하다가 독박쓰기가 십상인데,

  나를 지켜줄 유일한 갑옷은 용감한 상사도,

비싼 변호사도,  말빨도 아닌 

바로 '규정을 지켰는가?'라고 했다.


 내가 과연 불필요하다 싶은 규정을 무시하고, 상황에 맞게 규정을 변형해서 적용해서 얻는 이득이란 과연 무엇인가?

고작 당장의 귀챦음을 해소하거나, 누이좋고 매부좋은 식의 효율을 추구한다는 그런 하챦은 이유 때문에 어쩌면 나는 직장에서의  알량한 생명줄을 함부로 걸고 있었다.

나의 ISTJ 상사는 단지 기존의 체제를 숭상하고 

변화를 싫어해서가 아닌,

조직원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규정우선주의 노선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한 조직내에서 꽤 인정을 받고 있는 재원이기도 하다.


 나는 소림사에 입단했다는 각오로 내 본성에 위배(?)되는 그의 몇 가지 특징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5분 안에 끝낼 수 있는 일은 미루지 않고 당장 해 치우기.

아무리 사소해보이는 절차라도 고지식 해 보일 정도로 준수하기.

돌다리도 두드려 보는 심정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더블 체크 하기.

업무와 관련된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문서로 저장하기.

마이크로 매니징에 걸맞는 마이크로 리포팅.

해? 말어? 안 해도 될 거 같은데...싶은 생각이 들면 무조건 하고 보기.

미리 할 수 있는 일은 미래의 나를 돕는다는 생각으로 최대한 지금 해 놓기.


물론 쉽진 않았다. 지금도 진행중이다.


그런데, 점점 결과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그때 바로 해버려서 다행이다..휴~ 하는 경험을 몇 번 하고 나니,

일을 미루는 것이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5분 안에(처음엔 2 분) 끝낼 수 있는 일들, 이를 테면 간단한 이메일이나 전화, 서류 정리 등을

바로바로 해치워 버리니, 일이 쌓이지 않고 자칫 지지부진하게 흘러갈 뻔한 일들이

제법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것이 보였다.


 맞겠지.. 했겠지...하고 내심 믿고 생략해 버리던 재확인 작업을 다시 해보니, 실수한 것이 눈에 들어온다.

얼마전에는 동료가  놓은  실수를 발견하여 

바로 손을 썼는데,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던 기염을 토하기까지 했다.


 감정적인 칭찬보다는 사실적인 칭찬을 주로 하는 나의 ISTJ 상사가 내게,

그답지 않게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워 보여주는 일이 잦아졌다.

문득 그는 자녀에게 정말 훌륭한 양육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 정말 고생했어요"  아닌, "오늘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많은 일을 하셨네요"라고 칭찬하는 그가 가끔 보이는 감정적인 칭찬은 무척 고무적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런 모드를 가정에까지 갖고 오는 것이 

다음 목표이다.

그런데 8시간 동안 본성에 반하는 (?) 살고 

집에 오면 정말 번아웃이 되어버리니,

사람   변하는가 보다.


 집에서의 나는 집안에서의 거의 모든 의무에 게을리하며 여전히 내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산다.

"내일 아침 7시 30에 출근해" 하고 남편이 하는 말은 한 쪽 귀로 넣고 다른쪽 귀로 배출하는 바람에

도시락도 못 싸서 출근시키기 일쑤이다.

빨래는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나는 드러누워서 

오늘의 웹툰을 보는 것이  우선순위 업무이다.   


 그래도 나는 자부한다.

이처럼 NTP는 STJ를 억지로라도 벤치마킹 할 수는 있지만 STJ는 결코 NTP를 따라할 수 없다.

네? 별로 안 따라하고 싶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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