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 드라마를 보고 감동받은 자의 소감문
최근에 유튜브로 드라마 한 편을 정주행 했다.
1시간 짜리 드라마 두 편을 15분 내외로 요약정리하여 올려준 덕분에 20부작 드라마를 세시간만에 정주행 할 수 있었다. 불필요한 장면들은 모두 쳐내고, 엑기스만 딱딱 정리한 크리에이터의 편집 솜씨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 분은 아마도 학창시절 국어 과목에서 문단 나누기 및 요약 정리를 기똥차게 잘했을 거라 생각한다.
내가 뒷북으로 감상한 드라마는 이미 수년 전에 화제가 되었던 <품위있는 그녀>라는 드라마이다.
TV 드라마를 그닥 즐기지 않는 내가 어쩌다 썸네일에 홀려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봤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내 기준, '덕선이는 과연 누구랑 결혼했을까?' 보다도 훨씬 흥미진진한 '박복자는 과연 누가 살해했는가?'를 시작으로 한 궁금증 유발이 아마 한 몫 했으리라.
시각적 쾌감마저 선사하는 김희선님의 화려한 미모와 이 사람이 이렇게 연기를 잘했다고? 하고 다시 보게 만드는 김선아님의 반전 매력 외에도 이 드라마는 막장 드라마의 시그너쳐라 할 수 있는 김치 싸대기를 비롯한 얼굴에 파스타 문대버리기와 같이 시청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볼거리가 많았다.
그러나 당시 이 드라마가 '막장을 가장한 명작'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세간의 화제가 된 이유는 우리에게 '품위'라는, 어쩌면 해태나 유니콘과 같이 실체가 불분명한 미덕을 김희선 님이 분한 '우아진'이라는 여성을 통해서 시각화해주었기 때문인 것 같다.
김희선님이 귀에 때려박는 딕션으로 남편의 상간녀를 참교육 시킨다든지,
재벌가 며느리로서의 의무를 완벽하게 수행한다든지,
상류층 처자들의 모임에서도 대세에 휘둘리지 않고 소신발언을 한다든지,
시아버님의 생일 파티에서 트로트를 부르며 분위기 메이커의 역할을 톡톡히 하는 장면과 같은
수많은 하이라이트가 있지만,
개인적으로 나에게 무척 인상깊었던 장면은 따로 있다.
극중에서 재벌가의 돈을 노리고 간병인으로 위장 취업한 '박복자'(김선아분)는 사사건건 그녀를 못마땅해하는 큰 며느리와 대립구도에 있다.
큰 며느리가 자신의 고양이를 내다 버려서 화가 난 박복자는 큰 며느리의 고등학생 아들을 비오는 밤 중에 밖으로 내쫓아버린다. 쫓겨난 아들은 작은 엄마인 우아진 부부가 머무는 별채에 가서 도움을 청하고 이에 대노한 우아진이 '박복자'에게 일갈하는 장면이다.
"그렇다고 우리집 장손을 밖으로 내쫓아요?!"
작가의 디테일한 필력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인건지, 아니면 내가 유독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한 줄 대사가 주는 감동은 무척 묵직했다.
조카가 오밤중에 가정부로부터 밖으로 내쫓긴 상황은 황당하고 안타깝지만 내 아들은 아니기에 굳이 총대메고 나서기 보다는 적당히 화내는 척 하면서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우아진은 진심으로 분노했고, 나는 그녀가 '우리 조카'라고 일컫는 대신 '우리집 장손'이라고 칭하는 데서 형용할 수 없는 품위를 느꼈다. 더군다나 그 조카는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위상이 위태위태한 아이라는 설정이 우아진의 한 줄 대사에 감동을 더한 것 같다.
또한 재벌 시아버지가 대놓고 구박하는 큰 며느리와 200% 신뢰하는 작은 며느리라는 설정은 시기 질투, 중상 모략 같은 클리셰를 생산할 수 있지만 오히려 극중에서 이 두 동서지간의 사이는 무척 좋다.
우아진은 큰며느리와 번번히 마찰을 빚는 박복자에게 '무조건 우리 형님 말씀 대로 해 주세요'라고 단호하게 말하면서 큰 형님이 없는 자리에서도 타인에게 자신의 큰 동서를 높힐 줄 안다.
시아버지한테 혼쭐이 나고 우울해있는 큰 동서를 노래방에 데려 가서 기분전환을 시켜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지녔다. 아마도 그것이 큰 며느리가 작은 동서에게 열등감에 휩싸이기는 커녕 그녀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이유일 것이다.
유재석님이 오랜시간 전 국민적인 사랑을 받는 이유도 이러한 비슷한 맥락 아닐까?
남녀노소 불문, 상대방을 최대치로 존중하는데서 비롯되는 톤 앤 매너 말이다.
대학생 시절, 친구과 까페를 갔을 적의 일이다.
화려하게 차려 입은 사모님께서 자신이 앉은 테이블로 커피숍 알바생을 불러다놓고 한참 컴플레인을 한다.
내용인 즉슨, 이 분이 무슨 홍차를 주문하셨는데, 그 홍차와 걸맞지 않은 찻잔에 서빙이 되었다는 좀 황당한 이야기였다. 그 싸모님은 전문 용어를 써가시면서 본인이 얼마나 다도(茶道)에 조예가 깊은지, 이 카페의 서비스 수준이 얼마나 참담한 지경인지 조목조목 따지고 계셨는데,
어깨 너머로 듣고 있던 내 친구의 입에서 단박에 나오는 말은 " 으... 아줌마,, 교양없어" 였다.
자신의 교양을 과시하고픈 여사님이 남들에게는 오히려 교양이 없어 보이는 아이러니라니.
좌우지간, 잘 나가다가도 뒷심이 빠져서 용두사미로 허겁지겁 마무리하기 십상인 시리즈물과는 다르게,
이 드라마는 엔딩까지 명확한 주제의식을 보여주며 완벽하게 마무리했다.
마지막화에서 박복자가 재벌가에 의도적으로 접근하게된 계기가 나온다.
박복자는 고급호텔에서 메이드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당시 스위트룸에서 머물던 우아진의 고급 투피스를 세탁해주고 그녀의 친절에 감명을 받는다. 단지 상류층이라서 보일 수 있는 여유로움이나 도덕적 허세가 아닌, 우아진은 박복자를 한 사람의 직업인으로 대하고 그녀의 서비스에 대해 동등한 고객의 입장에서 감사를 표한다.
세탁을 너무 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디서든 항상 행복하세요
라는 손글씨와 작은 선물을 받은 박복자는 그 익숙하지 않는 친절에 한동안 먹먹해한다. 그리고 그 감동은 곧 나도 저 여자처럼 되고 싶다라는 강렬한 욕망으로 번지고 재력을 손에 쥐면 자신도 저절로 품위있는 여자가 될 것이라 생각한 나머지 재벌가를 상대로 사기극을 벌인 것이다.
외도한 남편과 이혼 후 재벌가 며느리라는 계급장을 떼고 나서도 여전히 변함없이 우아하고 품위있는 우아진을 보고 정작 재벌가 사모님이 된 박복자는 자문한다.
어찌하여 저 여자는 모든 걸 잃었어도 여전히 빛나고
나는 모든 걸 가졌지만 빛나지 않을까?
결국 품위있는 여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었음을 알고 허탈해 한
박복자는 결국 그동안 저지른 악행으로 인해 황망한 최후를 맞는다.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함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시어머님 생신도 깜빡할만큼 기념일 및 집안 대소사 챙기기가 쥐약인 나로서는 시아버지 생일 파티에 설치될 천막 설치까지 관여하는 그녀의 진지한 모습에서 만사가 귀찮고 매사에 덜렁대는 나와는 대조적인 우아함을 느꼈다.
작은 일에도 주인의식을 갖고 정성을 다하는 것.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타인을 정성스럽게 대하는 것.
외모를 정성스럽게 가꾸는 것.
자신의 루틴을 정성스럽게 지키는 것.
넓든 좁든 자신의 인간관계를 정성스럽게 유지하는 것.
품위있는 사람에 대한 공통의 키워드는 바로 정성에 있지 않을까?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나오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논어 중용23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