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서면 그만인 것을

돌아보는 삶(아버지라는 이름으로)

by 최국환





오월 끝자락, 제법 여름을 닮은 더운 날씨가 한동안 계속이다.

밤새 세상을 깨웠던 개구리울음은 사방 넋두리로 뿌려지고,

설익은 여름을 시샘하는 풀꽃 이슬마저 아직 여물지 않은 이른 아침이다.

지난밤 꿈속 날갯짓을 하던 이름 모를 들새 모습에 사지가 흔들리고,

서둘러 하루를 시작한 이웃 예취기의 소음으로 불편한 아침을 맞았다.


새벽 다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각,

대충의 고양이 세수가 이어지고 이내 정신을 가다듬어 하루일과를 시작했다.

지난주 심한 바람에 몇몇 어린 나무들이 맥없이 넘어졌던 매실 밭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다행히 3년 전 가꾸기 시작한 그 자리

매실나무들엔 튼실한 열매들이 땀방울로 달려졌고 그간의 수고에 답이라도 하듯

얌전히 고개마저 숙이고 있다.


삼 년 전 모든 것을 비우고 떠나왔던 어설픈 귀농,

이전처럼 호화롭지는 않겠지만 건강히 살리라는 결심에

봄에는 씨를 뿌려 여름을 기다리고,

땀으로 영근 것들에 감사를 하며 열심히도 살아왔다.

세 번의 겨울을 지나 봄을 맞이하고 살았던 지난날들,

이젠 제법 익숙할 때도 되었건만 아직 여러 가지로 허점투성이다.

오늘도 어눌한 자세로 시작했지만 아직 살아갈 날들이 한참이나 남았다는 기대를 가지고

더운 땀방울을 흘리기로 작정했다.


몽니로 어설퍼도 자란 과수원 풀들을 베어내는 것을 시작으로

지난 바람에 날렸던 흔적들을 지워주고

향으로 진하게 피어난 매실 밭 웃거름을 마지막으로 집으로 향한다.

아내의 만류에도 맨몸으로 덤벼댄 얼굴은

이내 검게 그을려 제법 여름 사나이의 면모가 거울에 비친다.

살짝 웃음기를 마음에 품으며 돌아서는 순간

어딘가 익숙한 그리움이 찰나 읽힌다. 아버지였다!


20년 전 일찍이도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모습이 세월의 흔적을 보탠 모습으로 비쳤다.

단지 그리움에서 일까?

아님 오래전 서울생활을 접고 낙향을 하신 당신의 매실 밭 향기가 오월의 그리움으로 다가와서일까.

그저 불효한 나의 오랜 죄스러움이 순간 묻어나고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 잊은 지 오래다.

아니 잊었다는 어설픈 변명보다 그저 마음속 한 구석에 보관해 필요할 때만 훔쳐보는

나만의 그리움이라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어릴 적엔 어리다며 엄마 품에, 자랄 땐 바쁘다며 세상 품에,

그리 흘리다가 가정을 이뤄선 아내와 아들을 품고…….

어머님의 얼굴보단 멀리, 기억 저편에 감춰두고 어느 한 편에도 보이지 않던 아버지라는 이름,

어지간히도 흘리고 세월을 산 것 같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새삼스레 떠오르는 기억으로 아련하기만 하다.

한참 전 대학을 졸업하는 날이었다. 무던히도 덥던 그해 8월의 어느 날,

후기 졸업식 중에 예정에 없었던 아버지가 학교를 찾으셨다.

철 이른 허름한 점퍼 차림에 얼마 전 겪으신 회사 부도의 흔적이 얼굴에 고스란히 묻어나셨다.

어깨에 둘러맨 구닥다리 일제 야시카 카메라의 무게도 감당하시지 못할 것 같은 기운이

고스란히 내 마음을 눌러왔다.


두 장의 사진이 훗날 내 손에 들려졌고 무슨 원망에서인지 그날 아버지의 무거운 흔적은

빛바랜 사진과 함께 이내 갈기갈기 찢기고 있었다.

꽤나 잘살았던 지난날들을 그리워하며 살림을 거덜 내신 책임을 당신께 모두 지우며

무거운 세상의 작은 짐조차 절대 거들지 않았던 무심했던 시절,

당신은 그런 내게 마음을 담아 내미셨던 소중한 사진 몇 장,

이제야 생각하니 그것은 단지 사진이 아닌 당신의 마음이었다.

아니 당신의 지극한 사랑 이상이었을 것이다.


오월하늘에 찔레향이 날고 있다. 아버님을 향한 용서를 담은 고백이다.


아버님 용서해 주세요…….

철 지나 한참 후에야 드리는 고백,

이젠 제법 어른스러워졌다 보이는 내 모습,

그 거울 한편에서 당신의 마음을 찾기로 했다.

하여 지금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고 있는 내 작은 세상에서

당신을 향한 나머지 고백을 담아내기로 한다.


결코 뒤편에서 가끔씩 찾아야 했던 그리움이 아니었음을.

태어나 지금껏 나를 감쌌던 따사한 햇살이었음을.

넉넉한 마음으로 피어난 그런 가슴이었음을.

가슴속 찢긴 아련함이었음을…….


향으로 먼저 피는 꽃이 있다면 서슴지 않고 당신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그 꽃잎 바람에 흩어져 흔적조차 찾지 못할지라도

결코 넋두리로 피지 않았음에 가슴속 찢긴 아픔으로 다시 피워내겠습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일어서면 그만인 것을.-




난 이젠

당신이 어디쯤 계신지도 모릅니다.

아마 내게 남은 건

당신께서 들려주신

이 한 마디 일 줄 모릅니다.

“넘어져도 괜찮다. 일어서면 그뿐인걸!”


그건 거짓 아닌

항상 품었던 당신의 고백으로

난 아직도 멀쩡히 서있음에


낙엽 지는 이 가을날,

바람에 쓸리는

당신의 뒷모습을 바라봅니다.

저만치 그리움으로 달아나는 내 기억 속

그래도 꿈쩍 않은 아버님의 뒷모습,


이젠 제발 다시 서시기만

간절하게 소망합니다.

아직 이 가을은 한창이나 남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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