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도 그리운 친구

아저씨도 여전히 아빠가 그립구나...

by dolias

가장 최근에 썼던 글이 '친구가 있나요?'였구나.

슬며시 웃음이 났다. 삶은 연속성이 있는 것 같다.

우연을 가장하지만 잘 살펴보면 우연이 아니다.


지난 일요일 고창에 다녀왔다. 물론 갑자기.

추석연휴에 올라가서 엄마를 모시고 내려왔다.

100세까지 약국을 하실 줄 았았던 엄마가

작년 12월 새벽,

화장실에 가시다가 고관절이 부러져 6개월 정도 병원에 계시다가 퇴원하셨다.

연세도 있고 팔십 년 동안 돌보지 않고 거칠게 사용해 온 몸은 회복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긍정적인 생각을 품고 아픔을 참으며 걷기 연습을 많이 하신다.

엄마가 걷기 힘들 것이라는 의사의 말에 버킷리스트가 생겼었다.

'엄마와 일주일 살기'

일주일이 아니라 한 달 살기가 되어서 선물을 몇 배로 받았으니

여기저기 다니면서 엄마와 시간을 함께하는 중,

갑자기 아저씨가 떠올랐다.

"엄마, 고창에 다녀올까?"

"그래,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이번이 아니면 언제 보겠어! 아저씨도 **씨(아줌마)도 너무 보고 싶다"

바로 직진~~~

토요일 밤에 카톡으로 연락드리고, 일요일 새벽에 회신받고 바로 떠났다.


고창...

나의 20대의 한편에 휘청휘청 남아있는 깊은 숲 속.

그곳에 아빠와 아저씨와 내가 있었다.

아빠는 사고를 당해 식물인간 상태였다가

기적이 일어나 반년이 넘어 의식이 돌아오였고

또 한참 몇 년이 흘러 퇴원을 하게 되었다.

아저씨는 친구를 어떻게든 낫게 해 보겠다는 굳은 마음으로.

고창에서 서울로 올라오셨다.

나는 아저씨께 운전을 배웠고

아빠와 둘이 있던 시간에

아저씨가 들어와 셋이 되니 덜 외로웠다.

우리가 어떤 사이냐면 죽음을 함께 한 사이다.

아저씨는 친구에게 좋은 한약을 먹이려고

고창의 지인이 하는 한의원에게 보약을 주문했고

우리는 경차를 타고(나의 첫차)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로 약을 받으러 나갔다.

나는 운전을 배우는 입장이었기에 아저씨가 운전을 하고

아빠가 친구니 보조석에 앉고 나는 뒷자리에 앉았다.

3차선까지가 좌회전 차로였는데 초행길이었던 아저씨는 그만

2차선에서 직진을 하려다가 3차선에서 좌회전하던 버스와 충돌했다.

차는 두 바퀴 반을 굴러 옆으로 세워졌고 아저씨는 기절하셨다.

무방비상태였던 아빠는 얼굴은 유리파편과 피로 가득했지만

눈만 끔뻑끔뻑할 뿐이었다.

현실을 대처할 사람은 나밖에 없었고

신발 하나는 깔려서 뺄 수가 없어

한쪽은 맨발로 사거리를 가로질러(다행히 바로 앞에 파출소도 있고 병원도 있었다. 살 사람은 사나 보다 ㅎㅎ)

응급실 수속을 마치고 내 꼴을 보려고 화장실에 갔더니 피범벅에 미친 여자가 따로 없었다.

그때 갑자기 무릎이 터지면서 피가 튕겨 나와 화장실 유리와 벽에까지 치밀어

피비가 내리듯 벽과 창문에 흘러내렸다. 나도 다쳤는데 아픈 것도 몰랐다.

무릎을 꿰맬 때도 감각이 없던 나. 무식한 건가. 제정신이 아니었던가.


아무튼 차 사고 이후 나를 아랫사람이기보다는

동등한 친구로 대해주신 듯했다.

기절한 것이 적잖이 부끄러우셨는지 본인의 용맹함을 재증명이라도 하시려고 했을까.

물론 명분은 교통사고 후유증을 예방하기 위한 침 맞기였지만.

용하기로 소문난 곳으로 새벽까지 달려가 번호표를 달고

무지하게 아프지만 효과는 끝내준다는 침을 맞게 되었다.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지만 대기표는 80번이 넘었는데

앞의 사람들이 너무 빨리 사라져서 순서가 금방 왔다.

바로 앞 순서 사람들이 들어가고 얼마 안 되어 비명이 들리더니 후다닥 달려 나왔다.

드디어 우리 차례. 세상에... 침이 진짜 젓가락만 했다. 굵기도 길이도.

아빠는 난리를 치시는 통에 당연 침 맞기 실패!

아저씨는 침을 보자마자 본인은 아픈 데가 없어서 안 맞나도 된다고 우겨서 실패!

우리 팀의 마지막 주자인 나는 묘한 책임감에 가장 아프다는 침까지 다 맞았다.

나를 바라보는 아저씨의 눈빛, 음... 존경심까지 담겨있었다. ㅎㅎ

나이 차이는 30살 이상이 났지만 난 아저씨가 편하고 귀엽기도 하고 그냥 친구같이 느껴졌다.


공기 좋은 곳에서 치료를 하면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으로

우리는 아저씨의 고향인 고창으로 내려왔다.

그때만 해도 아저씨의 집은 산 중턱에 있었고

대청마루에 누워 하염없이 하늘을 보기도 하고 낮잠을 원 없이 자기도 했다.

오솔길을 따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걸었던가.

똑같은 삼베저고리를 만들어 입고 가장 느린 걸음으로 어슬렁거렸던가.

대화도 없이... 묵묵히 걸었는데 많이 웃었던건 몰까.

고창의 내음, 하늘, 구름...

힘겨운 시절인데 아름답게 각인되어 있다.

몇 개월을 살았는지 정확하지 않다.

산이 환자에겐 너무 추워 눈이 내리기 전에 돌아왔으니까.


아저씨를 아빠 장례식에서 봤을 때

너무 말라서 마음이 아팠다.

오늘의 아저씨는 더 말랐다.

9년 전에 위암 수술을 받으셨단다.

신장이 원래도 작았지만 엄청 줄었는지

내려다보아야 한다.

"고창에 왔으니 장어 먹으러 가야지!"

묻지도 않으시고 익숙한 장어집으로 데리고 갔다.

본인은 달랑 2점도 못 드시면서

많이 먹으란다. 몸에 좋다고.

내가 몇 년 동안 먹은 양 중에 가장 많이 먹었다.

아저씨가 사주시는 거니까.

큰 차를 없애고 경차(내 첫차와 갗은)를 몰고 다니는 아저씨의

옆 자리에 앉아 있으니 내가 아빠가 된 것 같았다.

차 사고가 나던 당시의 아빠와 아저씨 나이가 바로 지금의 내 나이구나.

아빠가 여전히 그립다.

"아저씨, 지금까지 중에 어느 시절이 젤 좋았어요?"

"너네 아빠 있을 때가 가장 좋았지. 종섭이랑 놀 때가..."

아저씨가 집에는 담금주가 많았다.

"종섭이가 있었으면 저런 일이 없지. 다 마셔버려 남아 있는 게 없겠지. 이제 마실 사람도 없다.

오래된 술들이야..."

"너, 술 좀 하냐?"

"그럼요, 누구 딸인데요~"

"그럼 막걸리 좀 가져가~"

밥도 거의 못 드시는 아저씨의 유일한 식량인 막걸리를 아낌없이 주신다.

자고 갈 줄 알았는데 그냥 간다며 서운한 기색이 역력하다.

감도 따가라 해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한 박스 땄다(태어나 처음으로 ㅎㅎ).

뭘 계속 주시는지,

"친정집에 가서 바리바리 싸들고 가는 것 같아요~" 하니까

들은 척 만 척

"다음엔 온천도 하고 자고 가!" 하신다.


아저씨가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아빠의 친구가 어느 사이엔가 내 친구가 되어 버렸다.

의리 있는 남자, 고창 아저씨.

무뚝뚝하지만 정이 넘쳐서 마구 퍼주는 친구.


만나고 싶었구나. 나도 모르게.

그래, 우연이 아니라 내 마음이 간절히 원해서 오늘 만났다.

오늘이 우리 만남이 마지막이 아니기를 바란다.

마음이 닿으면 우연을 가장해서라고 어떡하든 만날 것이니

마음이 아려오면서 잔잔한 행복감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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