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휘를 내게 넘겼다. 휘는 독하게도 자신의 사랑을 던졌다. 어쩌면 자신마저 던져버렸는지도 모른다. 난 휘에게 줄, [한 번의 만남으로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법]이란 둘만의 그림책을 만들었다. 작은 수첩보다 더 작게 너 하나, 나 하나. 같은 학교에 다니니 학교 어딘가에서 한 번쯤은 부딪치겠지 하는 불확실한 믿음으로 네 것을 지니고 다닌다.
교무실에 심부름을 갔다가 호되게 혼나고 있는 휘를 본다.
"이런 나쁜 놈을 봤나. 할 짓이 없어서 여자애를 때려. 그것도 뭐. 팔이 스쳤다고? 미친것 아냐? 너 정신이 있는 놈이야? 여자애 부모님이 착한 사람이라 이 정도로 넘어가지. 잘못 걸리면 큰 일 터질 뻔했어. 권투까지 배운다며 써먹을 데가 없어서 여자애를 건드려? 말 좀 해보라고. 이 자식아!" 더 이상 듣기가 싫어 서둘러 교무실을 나온다.
휘가 다쳤구나. 세상과 등지려 한다. 세상이 자기를 버렸다고, 세상이 자기를 미워하기를, 지금보다 악랄하게 자신이 비참해지기를 선택했구나. 네 말대로 한 번 만났을 뿐인데 내가 왜 이렇게 힘들지? 그녀도 널 버린 건가? 무엇 때문에. 널 끝까지 돌봐줄 수 없다며, 내게 널 부탁했다. 그녀가 전근을 가려면 아직 2년은 남지 않았나? 무엇 때문에 서둘렀지? 내 곁엔 그녀의 체취가 느껴지는 곰인형이 있다. 이상하게도 곰인형은 인형 같지 않다. 무생물이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생물도 아닌데. 곰인형을 받은 이후로 그녀가 내 속에 있는 듯하다.
청소시간에 학교 옥상에 올라갔다. 학교 정문 쪽 큰길 반대편에는 아파트들이 많이 들어섰지만 학교 바로 주변에는 대부분이 단독주택이다. 학교 옥상에서는 집들의 옥상과 마당에 널린 빨래도 잘 보이고, 할머니들이 골목길에서 수다를 떠는 모습도 잘 보인다. 유치원 정도 되는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모습도 귀엽다. 저게 누구지? 휘다.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 되는 여자아이를 협박하고 있는 것 같다. 손에 칼도 쥔 것 같은데. 미치겠다, 정말. 너 어디로 가고 있는 거니? 나는 후다닥 뛰어 내려온다. 휘를 말려야 돼. 잡히기만 해 봐. 휘에게로 달려간다. 휘가 알아챈다. 도망간다. 울고 있는 아이를 그냥 둘 수 없어 아이를 달래준다. 그 사이 휘는 사라졌다. 나도 아이와 함께 운다.
그녀가 조금 미워진다. 휘에게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보다 그녀가 필요한 건 휘다. 그녀에게 따져야겠다. 휘가 이렇게 망가져도 되는 건지. 개인적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선생님이라면 학생이 그릇된 길로 가고 있으면 선도해야 되는 게 아닌지. 당신, 무슨 생각이신가요?
나는 이제 휘가 버리고 간 칼도 가지고 다닌다. 학교에서는 시간이 날 때마다 복도와 운동장을 서성거린다.
오늘 난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된다. 3학년이 되어 다른 반이 된 소정이가 갑자기 찾아와서는 휘 얘기를 한다. 사촌인데 어찌하다 한 집에 살게 되었단다. 엄마사랑 한번 못 받고 불쌍한 아이인데,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자기네 집에 와서 살게 되었다고. 소정이는 나와 친하지 않은 사이인데 이런 얘기를 갑자기 하는 게 예감이 좋지 않다.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소정이가 머뭇머뭇 묻는다. "휘하고 아는 사이인가 해서... 내가 휘 일기장을 봤거든. 딱 한 번이야. 우연히.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되는 건 알지?"
무슨 소리지? 난 휘의 엄마가 돌아가시자마자 아빠가 재혼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럼 휘는 아빠와 사는 게 아니라 아빠의 친척인 소정이네에서 살고 있는 건가? 하긴 아빠에 대한 미움도 반항도 크니 차라리 다른 집에서 사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 동갑내기 성별 다른 사촌하고 사는 건 좀 불편하겠지만. 어차피 친하게 지낼 사이도 아니니까. 휘의 성격상 말이야. 좋아. 소정이랑 한 집에 살고 있어. 그리고 소정이가 휘의 일기장을 보았어. 나랑 아는 사이라고 물었어. 일기장에 뭐가 쓰여 있는 거지?
"휘가 그 사이코 같은 국어선생님 좋아하는 거.... 너도 알지?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 한 달쯤 전부터 일기도 안 쓰고 아무것도 안 해. 권투장도 안 가고 씻지도 않아. 잘 먹지도 않아. 이러다 죽을까 봐 무서워. 정말 미안한데... 작년 겨울방학 때 국어선생님이 네게 편지를 전해달라고 했었어. 그날 널 만나지 못해서 주지 못했는데 계속 잊어버리고 있다가... 어제 그 편지 생각이 난 거야. 주기에도 너무 늦고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서 뜯어봤는데... 진짜 미안해. 그 사이코 널 좋아하는 것 맞지? 그래서 혹시나 사이코가 휘에 대해 네게 말했나... 또 셋이 함께 만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어. 아니야?"
난 소정이가 그녀의 편지에 대한 거짓말을 하기에, 휘의 일기장을 늘 훔쳐보고 있기에, 휘에 대해서도 진실이 아닌 것 같았다. 소정이는 휘랑 어떤 사이지? 아무것도 말하기 싫었다.
"무슨 소리야? 전혀 모르는 일인데. 무슨 말하는지 모르겠어"
소정이가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는다. 눈물이 그렇게 뚝뚝 갑자기 떨어질 수 있을까?
"나, 휘 좋아한단 말이야. 도와줘. 휘가 미쳐가는 것 같아. 그 불쌍한 휘가 이래도 죽어버리면 너무 억울하잖아. 세상에 좋은 것도 얼마나 많은데. 넌 뭐 좀 알 거 아냐? 응응?"
"무슨 말인지 모른다니까"
"나쁜 년, 사이코들끼리 똑같네. 휘가 네 이름을 몸에 새겨놓았다고. 칼로. 멍청아! 일기장은 찢어발기고. 이래도 모른 척할 거야? 휘를 죽일 작정이야? 다 너네 때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