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살의 유럽여행
22살 한 달간의 유럽여행을 계획하고 떠났다. 친구와 단 둘이 이렇게 장시간 여행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가장 친한 친구였으나 당연히 트러블이 가득했다. 중학교 때부터 싸우고 화해하기를 반복한 우리였기에, 이렇다 할 싸움은 하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자존심을 세울 시간에 사진이라도 같이 찍었으면 좋았으련만... (아마 지금 다시 여행을 간다 해도 똑같은 일은 반복될 것이다.) 외장하드를 뒤적거리다 발견한 로뎅의 정원 사진을 보며 생각했다. '이 날도 자존심에 따로 걸어 다녔지.'
사진이 무척이나 찍고 싶었다. 햇살을 쨍했고, 이제 여행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외국의 정원은 인생 샷을 남기기에 너무 좋은 곳이었지만, 이때는 셀카봉, 삼각대 그런 개념이 없었다. (여행책의 종이지도만 믿고 여행을 다녔으니까) 전쟁기념관에서 이 정원까지 오는 길에서 친구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주로 내가 길을 찾았기에, 친구는 나와 멀찍이 거리를 두고 따라왔다. 그리고 정원에 입장하자마자 우리는 다른 길로 걸어갔다. 너 없이도 나는 잘 즐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아주 찰나였다. 친구가 없이도 잘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오만했다. 이 넓은 정원에서 친구를 다시 찾는 건 불가능했다. 이때의 나는 사진 찍는 일에 아직 익숙하지 않고, 나 자신이 부끄러워 모르는 사람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는 말을 100번 정도 생각한 후에 할 수 있었다. 친구가 없으니 이 아름다운 정원도 모두 쓸모가 없어졌다. 그냥, 같이 다니자고 말을 할 걸. 스마트폰이지만 와이파이가 없으면 사용할 수 없는 로밍이 안 되는 내 핸드폰과 친구의 핸드폰이기에,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텔레파시였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부자들은 넓은 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키지도 않는 풍경들만 찍고 있다 보면, 후회가 되었다가 화가 났다가, 지옥의 문에 있는 감정들이 내 마음을 들었다 놨다. 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다른 발걸음을 돌렸을까. 그렇게 혼자서 시간을 보내고 유럽의 따가운 태양에 지칠 때쯤 입구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내가 먼저 도착했다는 것을 최대한 들키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친구를 기다렸다.
그러면 친구가 멀리서 보일 때쯤, 반갑게 인사를 했어야 했는데. 22살의 나는 그러지 않았다. 친구가 보일 때쯤. 무슨 패기였는지. 다가오는 유럽의 노부부에게 말을 걸었다. "사진 한 장만 찍어주시겠어요?"
부부는 흔쾌히 허락했다. 그리고는 찍어준 사진은 그다지 맘에 들지 않았지만 친구가 거의 입구에 도착해가기에 나는 성급히 "땡큐 땡큐!"를 외치며 떠나려 했다.
그들은 내가 자신들이 찍어준 사진을 확인하고, 괜찮은지 물었다. 마음이 급한 나는 괜찮다고 했는데(사실 햇빛 때문에 액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노부부는 환히 웃으며, 나를 찍을 수 있어 자신들이 더 영광이라고 말했다.
순간 나는 로뎅 미술관까지 친구와 걷던 묵언수행의 길, 그리고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이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나야겠다는 마음을 버렸다. 그들의 말 한마디에 나는 여행의 달콤한 조각을 하나 가지게 된 것이다. 만나면 내가 먼저 출구를 나서 친구를 당황하게 만들겠다는 나의 계획은 산산이 무너졌다. 나는 웃으며 친구에게로 달려갔다. "같이 다녔으면, 사진 찍었을 텐데. 지금이라도 여기서 좀 찍을래?"라고 말을 걸며.
물론, 우리는 다시 사진을 찍거나 정원을 돌아다니지는 않았다.
2014년 7월 파리 여행의 잔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