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길에 나는 늘 음악을 들었다. (얼마 전 회사를 그만두기 전까지)
나는 가수별로 폴더를 만들어 나만의 플레이리스트에 저장해 두었는데 그중 가장 자주 듣는 음악이 바로 동물원의 노래였다. 그들의 노래와 함께하는 출근길은 언제나 싱그러웠고, 그들의 노래와 함께하는 퇴근길은 늘 아름다웠다.
맑디맑은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때 묻은 내 영혼마저 순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좋았다.
동물원이라는 이름은 멤버 김창기의 2집 노래인 동물원에서 따온 것이라는데,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따스한 정감과, 두드러지는 것을 싫어하는듯한 그들의 색채는 묘하게 나와 닮은 구석이 있어 공감의 층을 두텁게 한다.
<시청 앞 지하철 역에서>는 1990년도에 발매된 노래인데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하기 전 지금의 남편과 한창 연애하던 시절에 나온 노래다.
"이번 역은 시청, 시청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로 시작되는 이곡은,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2호선 시청 역을 들락날락했던 내겐 옛 추억을 떠올려 주는 선물 같은 노래다.
남편은 졸업 후 삼성물산에 입사했다.
다소 정의로웠던 나는, 회사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던 동료 직원의 이야기를 듣고,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생각으로 사표를 내고 뛰쳐나와 과외를 시작했다. 내가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도 아니었는데 암튼 그때의 나는 그랬다.
삼성물산은 그 당시 늦은 퇴근시간으로 유명했는데 남편이 속한 부서는 유독 더 늦었다.
그런 이유로 출퇴근 시간에서 자유로왔던 내가 늘 삼성물산 본관으로 가서 남편을 기다리곤 했다.
6~7시에 퇴근하는 회사들도 많았지만 남편의 회사는 8시에 퇴근하는 사람들이 주를 이뤘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의 약속도 8시로 정해졌다.
하지만 우리는 단 한 번도 이 시간에 만난 적이 없었다.
2호선 시청역에서 하차한 나는 7시 50분~55분 사이에 회사 본관 로비에 도착한다.
왼쪽 한편에 자리 잡은 카페 겸 레스토랑과 자그마한 안내데스크 외에 아무것도 없는 그곳은 꽤 넓은 공간이었는데 어마어마하게 높은 천장 탓인지 나머지 빈 공간이 더더욱 넓어 보였다.
나는 로비 한 모퉁이에 자리 잡고 서서 설레는 맘으로 남자 친구의 모습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8시가 지나고 9시가 다가올 무렵이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사람들의 숫자가 대폭 줄어든다.
한 시간의 기다림이 지나갈 때면 다리도 아파오고, 설렘 가득한 내 얼굴 표정도 어느새 굳어진다.
9시쯤 만나는 건 운이 따라줄 때였다.
밤 10시. 로비 불이 모두 꺼지고 캄캄한 어둠 속에 오로지 나만이 홀로 있다.
처음에는 너무 무서워 심장이 두근거렸는데 그것도 반복되다 보니 점점 익숙해졌다.
어쩌다 한 번 열릴 때마다 새어 나오는 엘리베이터 불빛을 보며 이번에는 맞겠지 하고 고개를 돌려보지만 역시나 낯선 이의 퇴근이다. 그러기를 몇 차례, 다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왁자지껄 한 무리가 나온다. 그 속에 나의 남자친구가 있다.
긴 기다림 끝에 만난 우리는, 늦게까지 열려있는 주변 식당으로 들어가 서둘러 식사를 하고 막차를 놓칠세라 허겁지겁 뛰어가 버스를 타곤 했다.
사실 그렇게 하기까지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늦은 만남으로 화가 난 나는, 밥부터 먹자는 남자친구의 말은 듣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버스에 올라탔다. 나는 집 앞에 내릴 때까지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기껏 만나놓고 그 아까운 시간에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때는 그렇게 화가 났었다.
그 소중한 시간이 혼자만의 기다림으로 흘러가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남편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고, 나는 나의 화남을 알리고자 침묵의 투쟁을 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남자친구는 살며시 나의 손을 잡아주곤 했다. 따스한 온기에 얼었던 나의 마음이 그렇게 녹아내렸다.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가는 남자친구에게 "내일은 늦지 마." 하고 무심한 척 인사를 한다.
그럴 때마다 남자친구는 "응, 내일은 안 늦을 거야." 하며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수도 없이 했고 나는 그걸 또 믿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나의 기다림은 계속되었고 어느새 나는 건물의 경비아저씨와 밤마다 인사 나누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아저씨의 인사는 언제나 "오늘도 늦으시나 보네요~"였다.
호루라기를 불며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라고 수상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보시던 그 아저씨와 어느새 인사도 하고 짧은 대화도 나누는 그런 사이가 된 것이다.
지금의 표현을 빌리자면 웃픈 나날들이었다.
매번 그렇게 기다릴 거면 아예 주말에만 만나는 게 옳았겠지만, 그 당시 우리는 매일 만나고픈 마음에 그런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다.
그 시절 우리의 연애는 무척이나 애틋했었나 보다.
시청 앞 지하철역은 우리 부부에겐 잊을 수 없는 장소이며 또한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 장소이기도 하다.
오늘도 그 시절의 기억이 나를 미소 짓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