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밀당의 고수

by 돌콩마음

유난히 춥게 느껴졌던 올해 겨울이었다.

창 밖을 보며 밤새 내린 눈의 아름다움에 취해 들뜬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 날도 많았지만, 마음 한 편에서는 어서 빨리 봄이 오기를 바라는 작은 소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몇 해 전 집수리를 하면서 베란다 공간도 손보았었다.

타일이었던 바닥에 방수처리를 하고 그 위를 장판으로 깔아 거실에서 신발을 갈아 신지 않고도 베란다로 나갈 수 있도록, 거실 마룻바닥과 자연스레 연결되도록 공사를 했다.

그러다 보니 편해진 발걸음에 베란다를 찾는 횟수도 점점 늘어갔다. 식물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커피를 마시며 하늘멍, 구름멍에 빠져 보기도 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창문을 가려주는 블라인드 중 두 개만이 열려 있다는 것이었다.

아파트 동간격이 그리 가까운 편은 아니지만 왠지 모든 블라인드를 다 걷어올리면 나의 움직임이 밖으로 비친다는 생각에, 작은 정원 위로 햇살이 닿는 두 개의 창문만을 개방해 두었던 것이다.




겨울에 속하는 2월이지만 따스한 햇살과 봄의 기운이 얼마간 지속되던 때가 있었다.

봄에 대한 나의 갈망 때문이었을까, 그토록 기다리던 봄이 마침내 우리를 찾아왔다고 확신한 나는 베란다로 나가 과감히 모든 창문의 블라인드를 힘껏 끌어올렸다. 그러자 블라인드 뒤에서 이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눈부신 햇살이 베란다 전체에 쏟아져 들어왔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예전 같으면 얼굴에 햇빛이 닿을세라 손으로 가리기 바빴을 텐데 나는 온몸으로 그 빛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따스함이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고 그 온기는 나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리고 그 설렘에 행복이라는 감정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혼자 누리는 그 시간과 공간이 너무나 아까워, 일하고 있는 남편을 기어이 불러냈다. 휴대폰 속 잔잔한 곡을 백뮤직으로 깔고 티테이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모든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따뜻한 햇빛을 한없이 즐겼다. 기미 따위는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오히려 베란다 전체를 개방? 하고 나니 진작 그러지 못했음이 아쉽기까지 했다. 우리는 마치 배터리를 충전하는 것처럼 따스한 햇살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커피 한 잔과 함께 이야기 꽃을 피웠다.

우리가 함께한 학창 시절, 친구들, 아이들 이야기에 함박웃음을 짓기도 하고 아련한 추억에 빠져 각자 짧은 침묵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그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날이 참 좋다.", "햇살이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이제 정말 봄이 왔나 봐."

그렇게 나는 나의 행복을 숨기지 못하고 속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을까. 또다시 찾아온 추위와 시린 바람 그리고 폭설.

봄을 갈망하고 예찬하며 이미 봄이 왔노라 설레발을 쳤던 나 자신을 후회했다.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들켜버린 탓에 나의 속마음을 알아챈 이 녀석이 밀당(밀고 당기기)을 시작했으니 말이다.

이제 나는 녀석의 눈치만 볼 뿐이다.

한 발 물러 선 내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밀당의 고수는 다시금 따스한 햇살과 온기로 나를 유혹한다. 하지만 이제 나는 경거망동하지 않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생각이다. 녀석의 밀당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오늘도 나는 애써 속내를 감추고 있다.


그런데 나와 밀당을 하고 있는 녀석은 겨울일까. 봄일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