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님의 마을 방송과 흡사한 교장 선생님의 개회사가 울려 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반별 달리기가 시작되었다.
같은 반 친구들 5~6명이 한 조가 되어 달리기를 한다.
3등 안에 들어오면 손등에 도장을 받을 수 있고 집으로 돌아갈 무렵이면 그 도장의 힘으로 손에 선물이 쥐어진다.
하지만 우리 아이는 유치원생일 때도, 초등학생이 되어서도, 연습을 할 때나, 실제 경기에서도 3등 안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나 역시 달리기는 꽝인지라 아이가 나를 닮아 달리기를 못하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바로 그날 반별 달리기가 끝났을 무렵까지만 해도말이다.
출발 선에 발을 내딛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예상한 대로 아이는 이미 양손으로 귀를 막고 서 있었다.
최소한의 소리만을 듣기 위해 작은 몸부림을 하며 그렇게 서 있었다.
(우리 아들은 어릴 적 큰소리에 대한 공포증이 있었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 글에서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한다.)
시작을 알리는 총소리가 울려 퍼지자 아이는 귀를 막고 있던 두 손을 내려 불끈 쥐고는, 이미 출발한 친구들 뒤에서 달리기를 시작했다.
1학년 아이들이라 그런지 모두들 그다지 속력을 내지는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엄마를 찾느라 두리번거리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또 찾은 엄마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 보이는 여유까지 갖췄으니 1학년의 달리기는 느린 자들 중 그나마 빠른 자를 찾아내는 경기에 불과했다.
그러다 보니 참석한 모든 부모들을 깔깔 웃게 만드는 재미있는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엄마를 빨리 찾은 아이는 아직도 엄마를 찾지 못한 아이를 쉽게 추월해 앞으로 나간다.
1등으로 달리던 아이는 갑자기 멈춰 서서 엄마와 대화를 시작한다. 아침에 집에서 못다 한 대화가 있었나 보다. 두세 명의 친구들이 그 아이를 스쳐 지나가자 아이의 엄마는 그만 얘기하고 빨리 뛰라며 목청껏 외쳐대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아이의 모습에 모두들 쓰러질 듯 웃어댄다.
아무튼 이러한 상황 속에 우리 아이도 꼴찌를 면할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맞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이는 끝까지 꼴찌를 유지했다.
그리고 그렇게 오전 행사가 끝났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방송이 흘러나와 준비해 온 도시락을 돗자리 위에 펼치고 있으니 아들이 달려온다.
잘했네, 땀 많이 흘렸네, 천천히 먹으라며 음료수를 따라주는데, 2부 시작하기 전에 빨리 먹고 친구들과 놀아야 한다며 허겁지겁 밥을 먹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그리고는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장소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간다.
친구들이랑 노느라 한동안 안 보이더니 그사이 목이 말랐는지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시 달려온다.
계주선수로 나가도 될 듯한 빠른 속도로 뛰어오는 그 모습이 너무 웃겨서
"달리기 할 때 이렇게 달렸으면 좋았을걸 아까는 왜 그렇게 천천히 달렸어?" 했더니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시고 일어서며 아들이 한마디 던진다.
"새치기하면 안 되잖아요!"
아..... 그랬구나
출발하면서부터 1등의 자리에서 달리지 않으면 2등은 새치기로 1등이 되어서는 안 되고, 그런 논리로 3등은 2등을, 4등은 3등을 따라잡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앞자리를 선점하지 못했으면 끝까지 그대로 가야 한다고 믿었던 울아들이다.
왜냐하면 새치기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니까.
다행히 울아들 조에서 누군가가 누구를 따라잡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발생했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새치기했다고 따졌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우리 가족은 그날의 에피소드에 한바탕 크게 웃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1인을 제외하고.
어느새 20대가 된 울아들.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앞으로 더 많은 경쟁을 치르게 되겠지만,
그 시절 그 마음처럼,
느긋한 속도로 달려가도 전혀 조급해하지 않는,여유를 즐길 줄 아는 삶을 살아가길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