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꽂이에서 노트를 꺼내는데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온다.
아주 오래전 남편이 아들에게 선물해 준 , 얇고 자그마한 책이다.
겉표지를 넘기니 첫 페이지에 남편의 글씨가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다.
'늘 자신감 넘치는 **이가 되길 바라며, 아빠가.'
잠시 손에 쥔 노트를 내려놓고 책장을 펼쳐본다.
기욤 아폴리네르의 <벼랑 끝으로 오라>
그가 말했다.
"벼랑 끝으로 오라!"
그들이 대답했다.
"우린 두렵습니다."
그가 다시 말했다.
"벼랑 끝으로 오라."
그들이 왔다. 그는 그들을 밀어버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날았다.
이 글을 처음 접하게 되었던 젊은 시절
나는 전율까지 느끼며 주먹을 불끈 쥐었었다.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때에는 '용기'가 있었고 '두려움'은 적었다.
벼랑 끝에서 날개를 펼쳐 힘껏 날아보겠다는 거대한 꿈이 있었고
설령 몇 번의 날갯짓에 추락하고 말았어도 다시 날아 보겠다는 의지도 강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마주하게 된 이 글이 60을 코 앞에 둔 나에게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 벼랑 끝에서 날아보라고?
= 다리가 후들거려 벼랑 근처에도 못 갈 것 같은데?
- 떨어지면 뭐 어떠냐고, 다시 날면 된다고?
= 아니야 이제 노년이라 부러진 날개가 회복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해.
- 뭘 두려워하냐고? 그렇게 용기가 없냐고?
= 응 모든 것이 두려워, 용기를 내는 것도 두렵다고!
같은 책의 같은 문장을 읽었을 뿐인데 시간이라는 녀석 앞에서 나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책장 속에 책을 다시 밀어 넣었다.
꺼내 둔 노트를 다시 쥐고 책상 앞에 앉는다.
생각을 바꿔본다.
세월의 흐름에 나이가 든 만큼 터득한 것 또한 많지 않은가?
두려움이 커진 만큼 무모한 도전은 하지 않는다는 것,
용기가 없는 만큼 무리한 도전은 하지 않는다는 것,
무모하지 않고 무리하지 않아 아픔의 크기도 덜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라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면, 그 또한 내 삶의 일부로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연륜의 힘이 내게 있지 않은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 꾸준히 해 나가는 것, 그것이 지금의 내가 세울 수 있는 작은 목표다. 목표라고 말하기엔 그 단어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들지만 말이다. 그렇게 나는 낮은 벼랑 앞에서 작은 날갯질을 해 보련다.
하지만
젊은이들이여
그대들에게는 용기도 있고, 젊음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으니
조금은 무모해도, 조금은 무리해도 그대들의 도전에 두려움을 갖지 말기를.
힘들고 험난한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기를.
나는 소리없이 소망해 본다.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에게 맞는 비상을 해보자.
높으면 어떻고 또 낮으면 어떻겠는가? 단 한 번의 날갯짓이라도 그 안에는 희망이 있을 것이니 말이다.
볼펜을 손에 꼭 쥐고 노트 한편에 자그마한 낙서를 남겨 본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날았다.'